여행 운동/중국여행4박5일

백두산과 중국여행을 다녀와서

아치울잡초 2007. 10. 18. 11:14

첫날 !

09시5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 비행기는 중국 상공 장춘, 심양을 거쳐 1시간 20분이 경과한 11시 10분경 북한접경 연길에 도착했다. 중국시간으로는 12시10분


 중식 후

 도문으로 이동, 두만강, 중조변경지대  두만강 도착

강폭은 50미터 내외로 큰 개천만하고

깊이라야 무릎정도 밖에 안 된다고.......

두만강 가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북한군 병사가 사진 찍지 말라고 손사래

몇발짝  뛰어가면 중국에서 북한으로 건너갈듯한 가까운 거리

 


 북한식 저녁식사후 연길로 이동  "백산호텔" 투숙


둘째 날

"백산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백두산으로 전용버스타고 이동 (약5시간30분) 넓디 넓은 만주벌판을 거쳐서 백두산에 당도하여

일련번호 매겨진 찝차타고 순식간에 백두산 천지(찝차)로 오르고

하산 길에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또 온천욕까지 즐긴 날

 

우리민족의 靈山 백두산(중국에서는 창빠이 長白산이라 부르고)에 당도하니

 

찝차가 우리 일행을 태우고 백두산으로 올라가기 시작.............

산허리 ?번을 휘감았는지 어찔어찔하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를 볼 때는 혹시 차가 미끄러저 벼랑으로 떨어질까 봐 아찔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비를 넘기고 이어 시야에 백두산 정상이 보인다.

고도가 높이 갈수록 나무들이 작아지더니 해발2500미터 부분에서는 칼로 잘라낸 것처럼 나무가 자라질 않는다

우리의 차는 해발 2600미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차하여 정상까지 약170미터는 걸어서 올라갔다

찝차를 타기 전에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고 어둑어둑해져 걱정했으나 천지에 당도하니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검푸른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니 장엄한 모습 숙연해지고  사방에 탄성이.... 

 

 

천지 깊이는 평균 220M정도이며 제일 깊은 곳은 320M나 되어 63빌딩 집어넣으면 꼴까닥하고 가라앉는다니 산꼭대기에 있는 호수로는 지구상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2500M가 넘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샘이 솟아 하루에 1톤씩 방류해도 20년간 쏟아 내야할 만큼의 저수량이라니 (천지의 60%는 샘솟는 물, 40%는 빗물이란다)  정말 엄청나다.

 

원래 물고기는 살지 않았으나 가장자리 일정 부위에 그물을 치고 산천어를 방류하여 적응시키며 차츰 차츰 행동반경을 넓혀주며 적응케 하여 현재 산천어 서식중이라고 .......

소문대로 괴물은 살고 있다고 하였으나 내 눈에 보이는 일은 없었음.

하산 길에 장백폭포에 들러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다 폭포줄기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더니 너무 차가워 얼른 손을 뺄 수 밖에 없었고..... 

 

3대가 은덕을 쌓아야 천지모습 볼 수 있다 했는데 안개 낀 천지와 안개 걷힌 말끔한 천지를 동시에 볼 수 있었으니 참으로 운이좋았던 기회 !

 

장백폭포 아래쪽에 있는 온천탕을 단체로 입장하였다. 

시설은 열악하였으나 그런대로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고 야외에서 시원하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시설도 갖추었다. 실내에 있는 욕탕중에 한곳은 너무나 물이 뜨거워 들어가는일을 포기했다.

 

저녁식사는 통돼지 바비큐를 특별메뉴로 하여 화려한 성찬(?)

여행사측에서 제공한 고량주를 나누며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자 백두산 등정으로 힘들었던 피로가 싹 가셨다. 

식당주인 양해를 얻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건배사”를 외쳤다.

“찐티엔 완샹 워칭크어(오늘밤은 내가 쏜다)”

“왜이 워먼 떠 여우이 깐뻬이(자! 우리들의 우정을 위하여 건배)”

일년 동안 중국어 배워서 현지에서 딱 한번 제대로 써먹었다.


백두산 밑에 위치한 “백화림산장”은 화장실에 무당벌레가 새카맣게 깔려있어 밟지 않으려 애썼고 취침동안 너무 추워 오들오들 떨고 잤는데

나마 침대도 싱글타입, 너무나 좁아서 도무지 아내와 같이 잘 수 없어 결국 따로 잘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 더 추웠음.  오들오들....

 


셋째 날

백두산 밑에 위치한 “백화림산장”에서 하룻밤 떨고 다시 연길, 용정으로  향하니

차안에서 현지가이드가 연변지역이 형성된 내력을 설명해준다

 

1952년 9월 3일 중국지린성[吉林省] 동남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 말부터 조선족이 개척해 정착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다.

이후 이 지역은 1948년 3월 '연변전구'로,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로 바뀌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어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가 되었단다

 

연길의 거리, 정겨운 모습

인력거가 이채롭고  장나라얼굴이 그려진  이발소 간판이 옛적 우리모습 떠올리게 만들었고

가로변 중국어 간판에는 반드시 우리한글이 위아래로 함께 적혀 있었다.

 

 

 

용정에 당도하여 일송정(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음)을 해란강에서 멀리 바라보고  우리 가이드 설명으로 족하기로  했다.

"해란강에 정착한 나라잃은 우리 민족이 멀리 산꼭대기 일송정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윤동주와 문익환선생께서 다니셨다는 “용성의 대성중학교”에 들어가 안내인의 설명을 청취하고 “윤동주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벽을 타고 오르는 등나무 잎사귀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오래된 校舍를 배경으로 또 여러 컷,

 

 

 

결국 사진만 남는다고 하니 눈으로도 찍고 마음속에도 찍어두고 손으로도 찍어두고....

중국가면 당연히 거치는 코스, 발 맛사지

일렬로 열댓명이 나란히 눕고 스무살 남짓한 여자아이들이 거의 일체화된 동작으로 시원하게 맛사지하자 고된 여행길 피로가 확 풀리는듯 하였다.

(약하게 강하게 주문할때는 "칭", "충"을 반복하고)

 

저녁에는 북한식 고급요리에 즉석 구입한 45,000원 짜리 북한산 "들쭉술"까지 곁들이며 북한여성들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

“인공기”를 엑스(X)자로 걸어놓고 북한 여성이 연주를 하며

노랑, 빨강, 분홍빛으로 곱게 단장한 북한여성이 기교 없이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모습은 온갖 기교와 겉치레에 식상해진 우리에게 정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丹漆無紋)


노래 끝나니까 객석에 있던 사람이 식당 한 모퉁이에서 인조꽃다발을 사들고 방금 노래를 부른 북한여성에게 안겨주고,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하고

그 꽃은 다시 뒤로 전해져서 또 다른 관객에게 팔리고 또 무대 위 다른 여성가수에게 안겨지고.......

“북한여성은 결코 돈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꽃을 받을 뿐입니다”

그 꽃 대금은 결국 그 꽃을 받았던 여성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저녁 늦게 연길공항에서 북경으로 향했다


넷째 날

만리장성, 용경협

10월초가 국경일이 낀 연휴라 해서 일주일 정도 공휴일이고 중국인구 13억명중 10억명이 이동한다는데  거의 북경에서 움직인다고  한다.

길 막히면 구경도 제대로 못한다 하여 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러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비는 부실부실 내려 비옷을 하나씩 받아들고 만리장성에 올랐다.

케이블카를 타고 한참을 올라 만리장성 당도하니 벌써 구경꾼이 꽤 많이  모여들었다.

지구 밖에서 보면 “만리장성”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만리장성의 엄청난 길이,

나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험준한 산맥의 능선위에 다시 만리가 넘는 성벽을 쌓아올린 엄청난 大役事

그 많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담고 있는 민초들의 노역,

절대권력자의 횡포속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넋이 이곳에서 스러져 갔을까?

 

기념사진 몇 장 찍고 조금 내려오니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할머니가 만리장성 위를 오르신다. 만리장성과 꼬부랑 할머니 겹친 모습이 너무 아이러니하여 또 한 컷!

 

케이블카가 없었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나라 “다마스” 모양의 “빵차”를 타고 용경협으로 이동하니 아! 이런 곳도 있었구나!

협곡에 댐을 만들어 이용하다가 주변 산과 만들어진 호수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젠 관광지로 용도변경 하였다고

 

 

보트를 타고 1시간 넘도록 일주하며 수려한 경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상공엔 외줄 타는 사람이 손짓하며 우릴 반기고, 하늘엔 케이블카가 다니고 호수에는 줄 이은 보트 행렬,

지나치는 보트위 사람들에게 반갑다고 손 흔드니 그저 바라볼 뿐 손은 흔들어 주지 않는다. 이곳 중국사람들이 다 그렇다나???  

곳에도 번지점프가 있었고 ~~~~

협곡을 따라 보트가 점차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는 산과 물속에 묻혀 버렸다.

높은 산과 일렁이는 호수 속에서 잠시 세상잡사 잊어버리고 자연속의 일부가 되었었다

 

용경협 관광을 마치고 그 유명한 북경서커스 구경을 갔다.

접시를 기기묘묘한 상태에서 돌려댄다. 동료 머리위에 머리를 거꾸로 받치고 돌려대고 사람위에 사람이 올라가서 다양한 형태로 돌려댄다

조명 빛깔 아름답고 만들어내는 공간속의 조형미가 정신을 빼앗아갔지만 내심 접시 떨어뜨릴까봐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달리는 자전거 한대에  한명씩 오르더니 이내 12명이 올라타고 자전거가 달린다.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 목표지점에 정확히 오르내리고 과연 북경서커스 대단하였다.

세종문화회관 두세배 되는 공연장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구경나온 관중이 가득하였다.

나올때 간판을 보니 “雜技”라고 되어있고

가이드는 차안에서 중국말로 서커스를 뭐라 하느냐고 재미있게 물었었다.

(중국말로 “자쯔”라고 읽는데 듣기 따라서 남성성기를 일컫는 말로 들린다)

 

서커스 구경을 마친 후 연변의 맛사지와 조금 다르다 하여 어떻게 다른지 북경 발맛사지?에 단체 입장하였고 아침 만리장성에서부터 시작된 발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다섯째 날

4박5일 여정의 끝날

여러 곳에서 다양한 관광을 즐기다 보니 집 떠나온지 꽤 오래 지난 듯 싶었다.

중국 국경일 연휴기간 차가 막힌다 하여 또 새벽같이 일어나서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광장 바닥에 깔린 돌이 50만장,

돌 한 장에 두 명씩 올라서면 100만명이 동시에 집결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천안문 정면에 마오쩌뚱 초상화가 대형으로 걸려 있고  왼쪽에는 알짜배기를 장개석이 모두 빼내서 대만으로 가져갔다는 껍데기뿐인 “북경박물관”

천안문과 마주 보는 곳에는 용사의 탑, 그리고 오른쪽에는 뭐가 있었는지 가물가물....

 

천안문 앞 도로를 지하로 통과하여 자금성에 당도하니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에 놀라고

방이 9999칸인데 하늘님이 1만칸의 집을 갖고 있고 그  다음이 자금성 주인인 황제란다.

 

 

황제가 매일 밤 방을 바꾸어 사용해도 전체 9999개의 방을 전부 사용해보려면 27년이 걸린다고 한다.

(9999 나누기 365를 해보았더니 정말 27이 나온다)

 

거대한 옥돌에 조각을 하여 바닥에 깔아놓았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규모가  대단했다.

원래  옥돌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이었는데 그 크기나 섬세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오래 기억될것 같았다.

 

자객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넓은 정원에 나무 한그루 심지 않고 바닥전체에 돌을 깔아 놓았고

자금성 밖으로 나오니 성벽이 높다란데 그도 자객이 뛰어 넘을까 두려워 강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허기사 서커스 구경했더니 뛰어넘을수도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고도 자객의 침투가 두려워 황제가 잠자는 곳을 일체 비밀에 부쳤다하니 목숨 부지하기 급급한 황제자리도 그리 부럽기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친절한 가이드가 서태후와 동태후를 설명하며 역사를 꿰고 있는 모습에서 역사이야기가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참으로 재미있구나하고 느끼게 되었고 

 

서태후의 별장이라던 이화원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었고 호수의 물이 진시황제가 기거하던 자금성 성벽 곁에 흐르던 물과 통하도록  만들었다는데 그 인공호수가 하도 넓어서 끝자락이 보일락 말락 ~~~~

서태후가 신하 한명씩 데려다가 밤새 상담(?)을 하고 아침이면 처단해 버렸다는 산꼭대대기 정자를 멀리서 바라보고 북경의 명소탐방이 끝났다.

우리의 경복궁에 가면 우리 역사이야기는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재미있게 안내될까 내심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다.

 

4박5일을 30명이 동행하였다.

직원24명, 사모님 4분, 꼬마 2분 (여행사 2명, 가이드 1명도 동행)

새벽별 바라보고 일어나 자정이 다되어서야 잠자리에 들며 부지런히 다닌 결과 참으로 많은 곳을 다니며 흡족한 관광을 즐겼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이름이 “미키유천”이라던 29살 연변총각 가이드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울러 그가 들려주던 “중국축구와 공한증”, “연변축구팀 한국인 감독 이장수”, “심란했던 화장실문화”등이 떠오르면서

 

“저는 이곳 연길에 살고 있는 조선족입니다.

나이는 29살, 이름은 “미키유천”입니다.(실명은 유천)

연변에서는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TV프로를 실시간 위성방송으로 접하기 때문에

(불법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불법으로 한국TV프로를 보다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지만 이곳 연변사람들은 누구나 한국TV프로를  봅니다.

얼마 전에는 “주몽”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집에서는 한국말을 하고 밖에서는 중국말을 합니다.

큰아버지는 아직 평양에 살고 계셔서 저는 통행증을 받아 평양에 자주 다닙니다.

이곳 연변은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입니다.

우리 연변의 총수입의 1/3이 백두산을 다녀가시는 남한 관광객께서 도와주시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사람들에 대하여 참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지가이드인 저에게 반드시 다음과 같은 첫 질문을 합니다.

남조선과 북조선이 있는데 당신들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합니까?..........


이 질문은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편을 들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편을 들겠읍니까?...............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 모두 좋습니다. 다함께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의 영향권에 속하다 보니 국제정세나 나라밖 소식에 대하여 무지로 보냈습니다.

남조선은 헐벗고 거지가 우굴대는 곳으로 배우고 그렇게 인식하며 살아오다 88년 올림픽때 남한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손으로 비벼가며 보고 또 보고 그때서야 현실로 받아들이며 우리 조국이 저렇게 잘살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살아가는데 조선족이란게 자랑스럽고 그 기쁨과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88년 올림픽은 우리 조선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 전환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이 시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위원장을 만나고 계십니다.

여러분! 통일은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통일이 잘 안될 것 같습니다.“


애써 부정하는 미키유천의 모습에서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