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作談論/내 아버님

아버님의 입맛

아치울잡초 2011. 12. 24. 12:17

 

 

 

   

며칠 전 아버님을 찾아뵙고 안부를 드렸었다.

나이가 드시다 보니 이제는 음식을 입에 넣으셔도 도대체 맛을 모르겠다고 하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식 맛이 있어서 먹고 싶기도 하고

먹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셔서 무언가 궁금해지고 이런 저런 일들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이제는 음식을 드셔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그냥 드시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아버님께 음식 대접을 해 주시면

그래도 대접해 준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서 ‘아! 맛있게 잘 먹었다.’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무슨 맛인지,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일상의 삶도 음식맛과 같아서 도대체 사는 맛이 없어지셨다는 것이다.

구십이 다 되고 보니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혹시 지금 인생을 마감한다 해도 아무런 미련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될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신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과 한국에 사시면서

때로는 일본군으로 또 때로는 한국군으로 전장을 누비시면서

숱하게 삶과 죽음을 넘나드셨던 내 아버지.

“6.25참전용사”의 자격으로 “국가유공자”가 되셔서

돌아가시게 되면 ‘이천호국원’에 가시게 되는 내 아버지신데

누구보다 인생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 오셨지만

이제는 이런저런 미련 없이 인생을 마감할 수 있노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말씀을 들으면서 아버님께 대한 자식의 역할이 점점 없어져 가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려 왔었다.

 

오늘 맛있는 귤을 사가지고 아버님과 다시 마주 앉게 되었다.

귤이지만 시지는 않고 단맛만 많아서 드시기 괜찮을 것 같았다.

귤을 하나 집어 들어 까서 드시더니 맛있다고 하신다.

아무런 입맛 못 느끼시는 아버님께서 귤이 맛있다 하시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식이 아버님을 찾아드린 일이 고맙다는 말씀이시지

순수하게 귤 맛을 가지고 하신 말씀은 아닐 거라고 생각되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五味令人口爽 오미영인구상”이라고

‘여러 가지 화려한 맛이 입맛을 버리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맛을 느끼는 사람을 대상으로 담백하게 섭생하라는 것이지

모든 맛을 아주 느끼지 못하시는 아버님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라고 판단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생길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거기에서 연유된 판단이

얼마나 별무소용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