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風水등/전통과옛날것
조광조와 기묘사화
아치울잡초
2012. 2. 9. 12:50
기묘사화는 네 개의 사화 중에서 ‘선비들의 피화’라는 의미에 가장 적합한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삼사의 영향력이 대단히 팽창했을 때 국왕과 일부 대신이 그 관서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전격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연산군대 무오·갑자사화의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 삼사의 위상은 그만큼 확고해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묘사화는 삼사의 제도적 규정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마지막 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중종 후반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잘 나타나지만, 그 뒤 삼사는 권력자에게 사유화(私有化)되어 그의 정적(政敵)을 탄핵하는 기능의 변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중종 초반의 정치적 지형 ![]()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중종반정은 쉽게 성공했다(1506년 9월 2일). 왕조 최초의 반정이었기에 대규모의 포상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반정 직후 그때까지 가장 많은 104명의 정국(靖國)공신이 책봉되었고(9월 8일),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 삼대장을 중심으로 한 공신들은 중종 초반의 국정을 주도했다. 이들 삼대장의 위세는 1509년(중종 4년) 윤9월 삼정승을 모두 장악하면서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권력이 편중된 상황은 비교적 빠르게 해소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국공신의 과도한 책봉이었다. 1백 명을 넘는 인원이 보여주듯이, 반정에서 별다른 공로도 없는 사람이나 연산군에게 깊이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수 책훈(策勳-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줌)되었다. 삼사는 이런 객관적 문제를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삼대장을 비롯한 주요 대신도 직접 거론되었다. 예컨대 삼사는 박원종의 행동을 ‘지록위마(指鹿爲馬)’로 비판하거나(1510년 1월 10일) 홍경주(洪景舟)·성희안의 인사 청탁을 탄핵했다(1509년 2월 26일, 1510년 5월 7일). 삼사의 영향력은 계속 커졌다. 1511년(중종 6년) 10월 대사헌 남곤(南袞)과 대사간 이세인(李世仁)은 재변의 원인을 삼정승 김수동(金壽童)·유순정·성희안에게 돌렸다. 그들을 포함해 홍경주·신윤무(辛允武) 등 함께 지목된 대신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직했다. 삼사의 발언권은 계속 강화되었다. 3년 뒤인 1514년(중종 9년) 3월 삼사는 영의정 송질(宋軼), 우참찬 홍숙(洪淑), 형조판서 윤순(尹珣), 병조참판 강징(姜澂) 등 주요대신을 능력 부족과 탐욕 등의 혐의로 탄핵했다. 이 탄핵은 하루에도 7~9회씩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송질 등은 결국 체직(遞職) 되었다. 삼사의 집요한 탄핵으로 영의정을 비롯한 주요 대신 4명이 교체된 이 사건은 반정 이후 10년 정도 만에 삼사의 영향력이 다시 크게 강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주목할 사실은 삼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관은 “대간이 조정의 중요한 일은 거론하지 않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만 일삼아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니 조정에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고 비판했다(1514년(중종 9년) 11월 7일). 즉 중종 10년 무렵 삼사는 그 영향력을 다시 강화했지만, 중요한 국무는 거론하지 않고 작은 흠결을 문제 삼아 사람을 공격한다는 부정적 인식도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은 그 직후 단행된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등용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대신을 제어하려는 목적에서 기묘사림을 등용했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대신은 삼사에게 이미 상당히 제어된 상태였다. 오히려 문제는 삼사에게 있었다. 그들은 본질이 아니라 지엽에 치중하는 탄핵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등용은 새로운 인물로 삼사를 구성해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려는 중종의 정치적 구상이었다. |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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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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