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眞伊와 선비들
黃眞伊와 선비들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 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
〈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黃眞伊”의 時調와 漢詩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말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니불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시어든날 밤이여든 구븨구븨 펴리라.
내 언제 信이 업셔 임을 언제 소겻간듸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업네
추풍의 디는닙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산은 녯산이로되 물은 녯물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녯물이 이실소냐
인걸도 물과 가타야 가고아니 오노메라.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저 우러네어 가는고.
詠 半月 “黃眞伊”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一去後 愁擲碧空虛
수단곤산옥 제성직녀소
견우일거후 수척벽공허
누가 곤산의 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었는가?
견우 가버린후 근심 담아 푸른 허공에 던져놓았구나
黃眞伊와 소세양 (蘇世讓)
1486∼1562 <성종 17∼명종 17>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진주(晉州).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 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으나, 명종의 즉위 뒤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 사직하고 익산(益山)에 은퇴하였다.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며칠을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하지만 이 시로 봐서 황진이도 그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 같다.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 설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랭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의 시를 번안한 이선희 노래
알고 싶어요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맘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이것은 가수 이선희씨가 부른 ‘알고 싶어요’ 라는 노래 가사이다.
송도명기 황진이(松都名妓 黃眞伊)가 헤어진 연인 소세양(蘇世讓)을 그리며 읊은 ‘월야사(月夜思)’ 라는
한시를 번안(飜案)한 대중가요이다.
현대어로 의역(意譯)하고 더러는 앞뒤를 바꾸기도 했지만 한 남성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그의 사랑도 확인하고 싶어 했던 황진이의 시 속에 담긴 애틋한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원래 황진이의 시 ‘월야사’ 를 소개한다.
月夜思何事 월야사하사
달밤에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簫寥月夜思何事 소요월야사하사
寢宵轉輾夢似樣 침소전전몽사양
問君有時錄妾言 문군유시록첩언
此世緣分果信良 차세연분과신량
悠悠憶君疑未盡 유유억군의미진
日日念我幾許量 일일념아기허량
忙中要顧煩或喜 망중요고번혹희
喧喧如雀情如常 훤훤여작정여상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오신지
잠이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묻노니 그대여 때로는 제 말씀도 적어보나요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아득히 그대 생각하다보면 궁금한게 끝 없어요.
날마다 제 생각 얼마만큼 하시나요.
바쁠 때 만나자면 싫어할까 기뻐할까
참새처럼 조잘대도 제게 향하신 정 여전하온지
4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 간의 그리는 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종사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기생이 되기는 하였으나 한갓 탐화봉접(探花蜂蝶)이 되어 달려드는 같잖은 한량들의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되기는 싫었다.
시와 음률을 아는 풍류남아만을 가려서 사귀었던 황진이가 편력했던 남성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아마도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1486~1562)대감이었을 것이다.
月夜思何事월야사하사 와 靜夜思정야사
황진이의 月夜思월야사를 읊조리면 이백의 靜夜思정야사가 떠오른다. 황진이가 달을 보며 님을 생각했다면 月夜思이태백은 달을 보며 고향생각에 뒤척였다. 靜夜思황진이도 이태백의 시를 좋아 했을 터이니 月夜思월야사라는 시는 아마도 靜夜思정야사라는 시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靜夜思정야사 李白
床前看月光 상전간월광
疑是地上霜 의시지상상
擧頭望山月 거두망산월
低頭思故鄕 저두사고향
침상에 기대어 달을 보니
서리 내린 듯 하얗구나
머리 들어 산 위의 달을 보고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黃眞伊와 知足禪師 이야기
이조 중종시절, 개성에 황진이라는 기생이 있었어. 시조(時調)와 가무(歌舞)에 능한 절색(絶色)이었지.
천하의 남자들이 그녀를 품지 못해 안달이었어.
생불(生佛)로 소문난 개성의 지족선사(知足禪師)가 황진이소식을 듣고 탄식했어.
‘우매한 중생남자들은 그저 더러운 수컷짐승이러니. 허나 나는 황진이가 벗은 알몸으로 내 앞에 나타나 유혹한다 해도 참나무 막대기 보듯 하리라’
지족선사가 독경하고 있는데 소복한 여인이 마당을 가로질러갔어. 첫날은 무시했지.
둘째 날에는 향기를 흘리며 걷는 여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봤어.
셋째 날에는 살짝 비친 여인의 옆모습을 보고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웠지.
미인이었기 때문이야.
넷째 날부터는 자꾸만 그녀 생각이 떠올라 머리를 흔들며 목탁을 두들겨댔지.
그런데 마침 그녀가 상담을 청해왔어.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인이 말야.
‘소녀는 소향이라는 아낙으로 장원급제한 남편이 결혼 1년 만에 죽어 49제를 드리러왔습니다.
도력이 높으신 선사님을 흠모하여 이절을 찾아 왔사오니 버리지 마시고 불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날 밤, 그녀가 거쳐하는 방 쪽에서 간간히 곡성과 한숨이 새어나와 선사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
선사는 매일 그녀에게 불경을 가르치는데 불경보다는 자꾸만 잿밥생각이 나서 괴로웠어.
수삼일 후였어.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는데 그녀가 비를 맞으며 법당 앞을 걸어가고 있는 거야.
비에 젖은 하얀 소복이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몸매는 누드처럼 아름다웠어. 여인의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 듯 황홀했지.
그날 밤 선사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주는 거야.
선사는 옷을 벗고 달려들었지.
그러자 그녀는 요염하게 몸을 비틀면서 사정하는 거야.
‘스님, 소녀도 스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그리움으로 밝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밤만 참아주세요. 오늘이 죽은 지아비의 49제가 끝나는 날이옵니다.
49제 끝내고 제가 목욕재배하고 기다릴 터이오니 내일 밤 제 침소로 오세요.’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린 선사가 다음날 밤 달려가 보니,
웬걸! 소향은 보이지 않고 여인의 팬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지.
그 후 개성저자거리에는 웬 벌거숭이 중이 미친 듯이 소향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헤매고 다녔대.
소향은 물론 황진이였지“
黃眞伊와 徐敬德 (서경덕)
徐敬德서경덕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며〈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그의 학문은 남북 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讀書有感 서경덕(徐敬德)
讀書當日志經綸 독서당일지경륜
歲暮還甘顔氏貧 세모환감안씨빈
富貴有爭難下手 부귀유쟁난하수
林泉無禁可安身 임천무금가안신
採算釣水堪充腹 채산조수감충복
咏月吟風足暢神 영월음풍족창신
學到不疑知快闊 학도불의지쾌활
免敎虛作百年人 면교허작백년인
책을 읽던 때에는 경륜에 뜻을 두었더니
만년에는 오히려 안빈낙도가 달갑구나
부귀엔 시샘 많아 손대기 어려웠고
임천엔 금함 없어 심신이 편안 하였네
나물 먹고 고기 잡아 배를 채우고
바람과 달을 읊조리며 마음을 풀었네
학문이란 의혹 없어야 상쾌하나니
평생의 허랑함을 면케 할 수 있네.
이해와 감상
지은이의 인생관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한때는 경륜에 뜻을 두기도 했으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활이 빈곤하니, 그러한 처지를 깨닫고,
함연에서는 부귀공명에는 시기와 다툼이 많으므로
부귀를 버리고 자연에 묻혀서 살아간다.
경연에서는 임천에서 자족하며 즐기는 생활을 그리며,
미연에서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학문하는 바른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도학자로서의 높은 인격과 명리를 멀리하는 작자의 심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독서를 시작하던 당년에는 경륜에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는 학문의 깊은 이치를 터득하면서 세상사의 온갖 부귀를 버리고
임천에 묻혀 독서와 함께 안빈낙도하는 작자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이 풍부하되, 그 어느 것 하나 이를 즐기려는데 금함이 없다.
이러한 자연을 찾아 산나물을 뜯고 물고기를 잡으며 사는 생활,
그것을 멋으로 알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태도에서
우리는 선인들의 풍족한 정신세계와 탈속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黃眞伊와 林悌 (임제)
林悌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아버지는 오도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진(晉)이다.
큰아버지 풍암(楓岩)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았다.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이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肉談)적인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 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 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 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임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때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꿈에서나 그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절망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무덤 앞에서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던 시조이다.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임재는 결국 파면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