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風水등/漢詩·漢文

남명과 은하십리

아치울잡초 2012. 4. 1. 20:19

 

 

 

 

南冥 曺植

 

慶尙 左 退溪 右 南冥 1501년생

남명 조식은 조선조 연산군 7년(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이요, 호(號)는 남명(南冥)이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意氣는 18세 때 서울로 돌아와

성수침(成守琛)과 성운(成運) 종형제(從兄弟)를 만남으로써

이왕의 짙었던 속기(俗氣)를 떨쳐 버리고 보다 높고 넓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유서외(儒書外)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20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일, 이등으로 급제했다.

남명은 좌류문(左柳文)을 좋아하고 고문(古文) 에 능하여

시문(時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試官)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기 까지 하였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언경가가 멸문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삼가(三嘉)에 장사지내고

삼년려묘생활(三年廬墓生活)을 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에 이사하여 거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四海)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악립연충(岳立淵沖)하는 학문(學問)과 인격(人格) 을 닦았다.

 

여기에 성대곡(成大谷), 이청향당(李淸香堂), 이황강(李黃江), 신송계(申松溪)등 명류(名流)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己卯士禍以後) 퇴상(頹喪)했던

사기(士氣)를 응집(凝集), 재기(再起)를 도모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되었다.

48세 때 18년간 학문기반을 닦던 김해를 떠나 다시 고향인 토동(兎洞)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한편으로는 후진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처사(處士)로서

언론을 발(發)하여 국정을 비판하였다.

김해에서의 18년 생활은 급기야 사림(士林)의 기풍을

다시 진작하는 힘이 되어 사림은 그를 영수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이를 안 조정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 나 모두 사퇴했던 것이다.

이 때 선생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사상과 정신은 널리 알려져서

오덕계(吳德溪), 정래암(鄭來庵), 노옥계(盧玉溪)같은

기성학자들이 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대되었다,

 

특히 여기서 올 린 이른바 단성소(丹城疎)가 조정을 놀라게 하고

사림을 용동케 하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를 이루었다.

태산교악(泰山喬嶽)이니, 추상열일(秋霜烈日)이니 부시일세(俯視一世)니하여 선생의 선비로서의 기상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경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뇌룡정(雷龍亭)에 있던 시대다.

선생의 학덕(學德)이 더욱 익어가고 명망이 더욱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더욱 예우를 하고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61세가 되자 선생 일생의 마지막 도장(道場)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德山)의 사윤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고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과 도덕과 인격과 정신,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영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과연 선생의 일생은 이 산천재(山天齋)에서의 만년(晩年 61~72)을 잘 장식함으로써

우리나라 선비로서는 최고(最高), 최선(最善)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그것은 여기서 길러진 학생들이 조선 선조시대의 정치, 학술계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었고,

특히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왜토적(抗倭討敵)한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대부분

선생 문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66세에 징사(徵士)로서 포의(布衣)로 왕과 독대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했다.

선조가 등극하자 여러번 소명했으나 가지 않고, 헌책(獻策)을 진언(陳言)했으나,

조정의 호현(好賢)은 허명(虛名) 일 뿐, 반영(反映)되지 않아 속히 헌책(獻策)을 실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71세 때의 일이요, 국정(國政)에 대 한 마지막 발언이었다.

72세(1572)되던해 2월 8일 천수(天壽)를 다하고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시천면(矢川面) 사윤동(絲綸洞)에서 조용히 운명(殞 命)하였다.

 偶吟 南溟 曺植

人之愛正士   虎好皮相似   生前欲殺之   死後方稱美

(인지애정토 호호피상사   생전욕살지 사후방칭미)

 

우연히 읊음

세상 사람들이 바른 선비 사랑하는 것이 마치 호랑이 가죽을 좋아하는 것 같구나

살아있을땐 죽이지 못해 애태우다가 막상 죽여 놓고는 그를 아름답다고 탄식한다 

  "노무현대통령께서 돌아사셨을때 이 시가 많이 읊조려졌었다."

 

題德山溪亭柱    南溟 曺植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청간천석종 비대구무성   쟁사두류산 천명유불명)

 

 (덕산계정의 기둥에 씀)

청컨대 천석들이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네

어찌하여 저 두류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德山卜居 南溟 曺植

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춘산저처무방초 지애천왕근제거

백수귀래하물식 은하십리끽유여)

 

덕산에 살 곳을 잡고서

 

봄 산 어느 곳엔들 芳草가 없으랴만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에 가까운 것 부러워 찾아왔네

늙어 빈 손으로 돌아와서 무엇을 먹고 살거나?   맑은 물 십리 흐르니 먹고도 남으리.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요  다만 천왕봉이 상제(上帝)와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 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아갈거나  은하(銀河)가 십리(十里)이니 먹고도 남으리

 

산에 방초를 캐어 먹고 마을 앞 맑은 시냇물 먹으며  족하리라는 시심은 시가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경지를 아름답게 표현해 주고 있다.

 

스승의 시조에도 나오는 '두류산 양단수'는  스승의 산천재 앞을 흐르는 강으로

동쪽 삼장 매원사 쪽을  덕천강 시천, 내대쪽의 강을 내대천이라 한다.

덕천서원 앞에서 합수하여 1km쯤 온 지역이 양당마을 산천재 앞이니 전에는 폭이 200m이상 되었으나

최근에는 직강공사를 하여 반이상 좁아져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그 양당수를 은하에 비기고 그것을 퍼 먹으려는 상상을 한 스승의 큰 기개가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