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아버님은 매일 시장경로당으로 출근하신다.
달력에 빨간날 표시가 없으면
상일역에서 을지로4가역까지 계단을 오르내리시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니
그것만 해도 米壽지난 아버님께는 꽤나 많은 운동량이며 건강의 비결도 될 수 있다.
그곳 경로당에는 20여분의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화가출신에 기업체 오너, 금융인,땅부자, 상인 등 전력도 다양하고
70대부터 80대 후반까지 연령분포도 폭넓게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신다.
한해두해 그 인원이 줄어 이제는 열 대여섯분 정도 모이시는데
물론 그중에 대장은 가장 연장자이신 아버님이시고
먼저 가시는 분들이 안타깝게도 아버님보다 새파란 분들이시라며
묘한 표정으로 밀씀을 하신다.
함께 바둑, 장기들도 즐기시고 왕년의 무용담(?)도 늘어놓으시고
정치얘기며 문화이야기며 고담준론도 나누시는데
매일 전을 펼치니 누가 이제 입을 여시면 뻔한 레파토리가 된 스토리들이지만
어제도 오늘도 지속된다고 하신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고등학교과정까지 공부하셨던 어버님은
상당히 유식한 축에 들어 지금도 사리판단 정확하시고
일상에서 지식인의 풍모를 보이시는데
그런 아버님께서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시장경로당에서 참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
나이도 새파란 녀석들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해대며 막 우길때는 정말 참기 힘들다!”
본인들도 알만한 일인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버님보다는 연령이 적으시지만 그래도 80줄 상노인이실텐데
가끔은 아시면서도 어기짱 놓고 싶으실때가 있으시겠지요’ 라고 말씀드렸었다.
아버님께서는 ‘정말 그래서 그럴까?’하시며
크게 동조하시지는 않으시며 이야기를 마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지나 아버님과 마주 앉았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장에서 사람들이 그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떠들어 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도 언젠가 며칠 동안 집안에서 혼자 있다 보니
말할 기회가 없어 말을 안 하고 지내보니 하던 말도 잊어버리겠더라!
그저 되지도 않는 이야기라도 막 지껄여대야 그나마 말을 잊어 버리지 않겠더라.
그래서 나도 이제는 사리분별 뒷전에 두고 그저 아무 이야기나 막 하기로 했다.
그렇게 안하면 하던 말도 점차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맞받았다.
“그러세요 아버지! 말씀을 많이 하셔야겠네요!
다들 아버지보다 새까만 후배들인데 아무말씀이나 막무가내로 많이 하세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리분별이 분명하시고
남 배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셨던 아버지와
그에 맞는 고담준론을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구십 바라보는 노인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자랑스럽기만 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리분별, 배려하는 마음은 뒷전이라는 전제하에
아무 이야기나 마구 떠들며 살아야 하던 말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로가 공감을 해야 한다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