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避諱)라는 관습이
강의를 듣다가 피휘(避諱)라는 관습이 흥미로워 자세히 알아본다.
피휘(避諱)는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관습으로 피명(避名)의 의미였다고 한다.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는데 이 관습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주변의 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하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휘(諱)는 원래 군주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禮)에 어긋 난다’ 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字)나 호(號)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 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고 한다.
예전에 관리를 등용할 때면 과거시험을 치렀고 그 과거시험은 보통 3년마다 한 번씩 치러졌는데 선비들이 그동안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힘들게 올라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과거시험의 ‘시제(試題)’가 자기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가 나오면 주섬주섬 보따리 챙기고 시험을 포기한 채 두말없이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요즈음까지도 ‘피휘(避諱)’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상도 어느 엄격한 집안 출신이라 했는데 모기업 의 부서장 이야기이다.
내 지인 중에 ‘이종□’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그 부서장과 함께 근무를 했었는데 자기에게 굳이 ‘미스터 리’라고만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이름 ‘이종□’ 가 부서장 본인의 부친이름의 글자와 같은 자가 있어 굳이 피명하느라 어쩔 수 없는 조치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피휘(避諱)’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대한민국 어느곳에서는 지켜지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관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피휘(避諱)에 관하여 자세히 알아본다 (백과사전 참조)
피휘(避諱)의 종류
○ 국휘(國諱)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 가휘(家諱)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 성인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 원휘(怨諱)는 원수지간인 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는 서로 피휘를 지켜주었고, 군주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고 외교상의 문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군주와 그 일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를 택했으며 주로 한 글자로 지었다.
또한 피휘를 할 때
○ 글자의 전체를 피한다.
-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칩(啓蟄)을 경칩(驚蟄) 으로 바꾸었다.
○ 글자의 일부도 피한다.
-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의 일부인 正을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 로 바꾸었다.
○ 휘의 소리를 피한다.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성씨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가 뜻하는 “잉어”를 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피하는 경우도 있다.
- 황(皇)자와 고(辜)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辜)를 죄(罪)로 바꾸기도 하였다.)
피휘(避諱)의 방법
피휘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 대자(代字) : 피할 글자를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쓴다.
○ 결자(缺字) : 피할 글자를 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놓는다.
○ 결획(缺劃) : 피할 글자의 한 획, 특히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다.
한국의 피휘(避諱)
○ 신라 시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와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서 육십갑자의 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각각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라고 썼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휘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경(景)’을 썼기 때문이다.
○ 고려 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구당서》, 《신당서》등의 중국 문헌에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연개소문 (淵蓋蘇文)의 성을 천(泉)으로 고쳐 쓴 것을 알지 못하고 ‘천개소문’이라 표기하였다.
○ 고려 시대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문호양반(文虎兩班)'이라고 썼다.
이것은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피하기 위해 "호"(虎)를 썼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의 휘를 피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 고려 시대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 정종의 휘 요(堯)를 피하기 위해 고(高)라고 표기하였으며,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호(虎)로 바꿔 기록하였다.
○ 고려 말 충선왕이 즉위함에 따라 경상도의 한 현의 이름을 '경산현 (慶山縣)'으로 개명했다.
○ 조선 시대 대구군의 한자 이름은 원래 ‘大丘’였으나 공자의 휘 ‘구(丘)’ 를 피하기 위해 ‘大邱’로 바뀌었다.
1750년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공자의 휘가 ‘구(丘)’이므로 ‘大丘’를 ‘大邱’로 바꾸어달라고 상소했으나 영조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 때부터 점차적으로 ‘大邱’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 오늘날 대구광역시의 한자 표기 역시‘大邱廣域市’이며, 대구역과 동대구역은 각각 大邱驛, 東大邱驛으로, 대구선은 大邱線
으로 쓴다
○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
○ 조선 시대 유교 경전이나 서적을 펴낼 때 ‘丘’자를 붉은 종이로 덮어 두거나 붉은 네모 테두리로 둘렀다.
조선 시대 공자의 이름 ‘孔丘’(공구)를 말하거나 읽을 때 ‘공모’(孔某 : 공아무개”라는 뜻)라고 하기도 했다.
특수한 경우
○ 중국인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데, 오늘날 중국의 대표적인 매국노 가운데 하나로 지탄받는 남송의 진회(秦檜) 의 이름을 피하기 위함이다.
○ 원래(原來)라는 말은 원래(元來)였으나 ‘원(원나라)이 온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한자 문화권에서는 원나라가 물러난 뒤에 원래 (元來)로 바꾸었다. 오늘날에는 둘 다 쓰인다.
원나라를 이은 명나라 초기에 많은 관리가 원년(元年)의 元자를 원(原)자로 고쳐썼다.
○ 로마 시대엔 로마 숫자 4를 IV 대신 IIII로 썼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IV가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IVPPITER)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대표적인 피휘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