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국보 180호, 산수화, 조선 헌종 때 그림
配所輓妻喪(배소만처상)
秋史 김정희
聊 將 月 老 訴 冥 府 (료장월노소명부)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來 世 夫 妻 易 地 爲 (래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우리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我 死 君 生 千 里 外 (아사군생천리외)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使 君 知 有 此 心 悲 (사군지유차심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김정희의
配所輓妻喪 이란 시 입니다.
절해고도인 제주도에서
늘그막에 귀양살이를 하던
노정객에게 아내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이미 실의에 빠진
늙은 노인으로 전락해버린
자기에게 전해진 그 부고를 들고,
김정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가 이룬
예술의 경지, 명예,
모든게 부질없었겠죠.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고 싶지만
그 마저 불가능한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아내의 시신 앞에서
신발로 땅을치고
장단을 맞추며 노래했다는
장자의 경지는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오직,
자신을 그리며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간 아내가
원망스럽도록
사무치게 그리웠겠죠.
점잖게 표현했지만,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사랑이 절절이 묻어나오는,
예술가가 아닌...
정객도 아닌...
인간 김정희의
일면이 보이는
애처로운 시 입니다.
아내를..
아니면 남편을
그리워해보신 적이
있으셨나요...?
매일 만나는 사람이
그리울리가 있냐구요...?
그렇군요...
그래도 이 가을에는
한번 쯤은 그리워해 보세요.
그리고...
꽃 한 다발쯤 선물해 보세요.
안아드리는 거 잊지 마시구요...^*^
▒ 완당세한도 阮堂歲寒圖
지정번호: 국보 제180호
지정연월일: 1974년 12월 31일
시대 :조선 헌종 10년(1844)
규모·양식: 세로 23㎝ 가로 69.2㎝ 횡축
재 료: 종이 바탕에 수묵
소유자: 손창근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09
▒완당세한도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寫意體)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尹尙道) 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章岳鎭)ㆍ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金奭準)의 글과
오세창(吳世昌)ㆍ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와
우선(藕船)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이란 관지(款識)가 적혀있고,
"정희(正喜)"와 "완당"이라는
도인(陶印)이 찍혀 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까칠한 마른 붓질과
고담한 필선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부정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자연의 근원적인 창생력과
합일된 작가의 농축된 마음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에 의해 조성된
담박하면서도 고졸한 분위기는
문기(文氣) 또는
문자향을 비롯하여
문인화가 지향했던
형식보다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집약된 경지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희 영정(金正喜 影幀)
보물 547-5호, 조선 정조, 견본설채絹本設彩,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은
'추사 김정희 삶과 예술'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
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 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