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이리저리 다니던 중 눈에 띄는 공고문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OO도서관 소장’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내 경력으로 지원 자격이 충분했고 나이 제한도 없어
상당히 호감이 가는 자리라고 생각되었다.
급여도 만족할만한 수준이었고
직무내용도 도서관업무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업무이니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알고 보니 요즈음 도서관은 그 기능이 상당히 다양해져 있었다.
예전처럼 단순하게 책만 열람하고 대출해주는 곳이 아니라
주민과 소통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전개되고 있었다.
주민을 위하여 교양강좌를 하고 각종 문화이벤트를 실시하며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특히 디지털룸을 개설하여 주민들이 컴퓨터를 항상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며
학생이나 노인들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있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라고 하지만
이순의 나이가 넘은 사람에게는 그 직업도 귀하고 천한 것을 구분하여 일할 수 있으면
정말 다행한 일이라 여기던 내게 도서관 소장 자리는 더없이 탐나는 자리였다.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게 되었다.
총 여섯 분의 면접관이 불쑥불쑥 질문을 해왔다.
“OO공사에서 1급 단장까지 하시고 가든파이브 대표이사도 하시고 경력이 화려하신데
도서관소장 같은 작은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연봉도 얼마 안 되는데 정말 하실 수 있습니까?”
“스팩이 너무 좋은데 이런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도서관에는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차분히 답변에 들어갔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고들 하는데 저는 그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분명 귀한 직업이 있고 천한 직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명을 위한 불가피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면 직업을 가려서 갖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며
더군다나 저 같이 이순을 넘은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귀한 직업을 갖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제가 지원한 도서관 소장 자리는 너무나 귀한 직업이며 그래서 꼭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평생 공직생활을 하며 알뜰히 생활하여
이곳에서 정한 연봉이면 충분히 만족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팩이 너무 좋다고 여러분께서 자꾸들 말씀하시는데
경력사항이 화려한 것이 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며
어차피 경력사항을 적어내란 지침은 지원자의 스팩을 상호 비교하여
우월한 내용을 택하고자 함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스팩 좋다는 말씀들을 자꾸 하시는 것이
제 귀에는 뽑아 주시겠다는 내용으로 들리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스팩 좋단 그 말씀은 이쯤에서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네 도서관을 수시로 이용하며 컴퓨터작업도 하고 출력도 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이 계속되었다.
“도서관 소장으로서 어떤 일을 어떻게 추진하시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준비된 답변을 쏟아냈다.
“먼저 도서관 고유업무를 정비하고 모든 업무를 시스템화하여
고객위주의 도서관이 되도록 추진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시대 조류에 맞추어 도서관 업무를 전산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자체와 지역 문화단체 등 유관기관과의 협조를 긴밀히 하여
주민들이 질 높은 문화체험의 기회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타등등,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모든 것이 출중하신데 그렇다면 컴퓨터는 직접 다룰 줄 아십니까?”
바로 답변에 들어갔다.
“아직까지 제 문서는 제 손으로 작성하고 있으며
여기 제출된 ‘자기소개서’나 ‘업무추진계획서’ 또한 제 손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블로그를 만들어 6년째 운영하고 있는 중이며
평소의 제 생각과 글들을 제 블로그에 정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면접장을 나오는데 안내직원이 얘기를 해준다.
그날 다섯 명 면접을 보았는데 대부분 30분정도 걸렸다고,
그리고 나만 10분도 안 결렸다고......
일주일쯤 지나 발표가 있었는데 내 이름이 아니었다.
공모를 주관하는 기관에 아는 사람도 있고 공손하게 처신했고
스팩좋다고 칭찬 일색이었는데 왜 떨어졌을까?
대상자를 미리 정해놓고 줄서기 시켰나?
아니다.
내가 안된 이유는 그들의 말대로 ‘스팩이 너무 좋아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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