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 와 원교 이광사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 김정희가 주창한 금석학과 고증학은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뿌리부터 검증하는 일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강희 . 건륭 연간에 일어난 이 신학문을 더이상 오랑캐 학문이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스승 박제가의 훈도를 받고, 24세 때 아버지 따라 북경에 가서 그 학문과 예술의 번성함을 보고는 더욱 확신을 얻어 여기에 매진하게 된다.
글씨에 있어서도 그동안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개성적이며 향색(鄕色), 즉 민족적 색채가 짙은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를 글씨의 고전, 중국 한나라 때 비문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추사는 당시의 신학문과 신예술의 기수가 되어 기고만장하게 30대와 40대를 보내고 54세에는 정치적으로도 출세하여 형조참판(현 법무차관)이 되어 청나라에 동짓날 가는 외교사절단 부단장(冬至副使)이 되어 30년 만에 다시 꿈에도 잊지 못할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정변이 일어나 추사는 급기야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다행이 벗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절해고도인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니 그 인생의 허망은 여기서 절정에 달했다.
제주도 귀양가는 길에 추사는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귀양살이 가는 처지임에도 추사는 그 기개는 살아 있어 대흥사의 현판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아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떠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 7년 3개월, 햇수로 9년.
추사는 유배중 부인의 상을 당하고, 유배중 회갑을 맞았으나 축복해주는 이 없는 외로움을 맛보았다.
처음엔 찾아주던 제자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그런 중에 변치 않고 책을 구해다 주는 이상적의 마음에 감동하여 "날이 차거운 후(歲寒然後)에 소나무 잣나무 푸르름을 안다"고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귀양살이 하면서 그 외로움,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추사는 끌씨를 쓰고 또 썼다.
한나라 비문체뿐만 아니라 각체를 익혔던 그가 여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듬뿍 실은 개성적인 글씨를 만들어 내니 그것이 곧 추사체 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 사건 때 평양감사를 지냈던 박규수가 "추사는 바다를 건너간 후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평한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1848년 12월, 추사는 63세의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햇수로 9년 만에 맞는 해방이었다. 추사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었다.
추사 김정희, 그는 분명 영광의 북경이 아니라 아픔의 제주도로 갔기에 오늘의 추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이리하여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승방에는 추사가 귀양가며 썼다는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이 하나 걸려 있으니 나는 여기서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준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새겨 보곤 한다.
<대둔사(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신지도에 귀양살고 있던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이다.
획이 바싹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 갔지만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진다.
추사가 귀양가며 떼어내라고 했던 그 현판으로 여기에 구사된 원교체는 손칼국수의 국수발 같다.
<대둔사(대흥사)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 가면서 쓴 글씨로 획이 기름지게 살지고 구성의 임의로운 변화가 두드러져 있어 이 추사체는 중국의 탕수육이나 란자완스를 연상케 하는 그런 맛과 멋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귀양살이 이후의 글씨인 <명선(茗禪)>에 와서는 불필요한 기름기를 제거하고 자신의 기(氣)와 운(韻)을 세우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 경지란 원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높은 차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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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50주기를 맞은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한국독서학회 선정 ‘10월의 독서인’으로 선정됐다.
독서학회는 “추사는 중국에서 책이 발간되자마자 바로 구해서 읽은 것은 물론 제주 유배 시절에도 쉬지 않고 책을 구해 읽을 정도로 독서열이 높았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150주기를 맞아 김정희 명품특별전이 29일 과천시민회관에서 개막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추사 김정희-학예(學藝) 일치의 경지’ 특별전을 연다.
간송미술관은 다음달 15일부터 2주간 추사 특별전, 삼성미술관 리움은 10월19일 개막해 내년 1월28일까지 계속될 ‘조선말기 회화전’에서 추사실을 별도로 꾸민다.
[문화in] 2006 가을 秋史 바람…시서화․문사철 한 줄에 꿴 인문학의 대가
[중앙일보] 지금 인문학 위기를 알리는 비명이 하늘을 찌른다. 대학의 상업화가 이유라고 하지만 인문학 위기의 주범은 인문학 내부에 있다고 본다.
이미 100년 전 한자(漢字)가 버리면서 시작된 우리 인문학의 죽음이 더 일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화 100년간 우리는 분파된 서양학문에 매달렸다.
그 결과 원래 하나인 학문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어떤 원전도 맨눈으로 알 수 없게 됐다.
나와 세계에 대한 문답 보고인 퇴계.고봉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나 추사체의 조형과 내용을 직독직해로 간파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인문학의 불행이 있을까.
더욱이 예술품을 번역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오페라를 보는 대신 줄거리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18일 오후, 규장각 전신인 창덕궁 주합루. 추사 심포지엄에서 김봉준 실학축전 총감독이 "추사체야말로 중국도 만들어 내지 못한 동아시아 타이포그라피의 정수"라고 극찬을 했지만 합석했던 대학생 패널이 "그 훌륭한 추사의 언어와 문자를 하나도 모르겠다"고 고백한 지점에서 우리 학문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었다.
향후 100년이 걸릴지라도 추사를 원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재인가 노력파인가=추사는 인문학자의 초상이다.
반면 오늘날의 추사는 엄청난 작품 값에 따라 속물화되거나 인간으로선 이룰 수 없는 경지를 성취한 인물로 신격화된다.
하지만 속물화도 신격화도 추사의 뜻이 아니다.
추사는 천재이기 이전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화신이다.
1만분의 9999분을 노력으로 도달했으며 나머지 1분조차도 사람의 노력 밖에서 구하지 않았다.
'추사체'의 기괴(奇怪).고졸(古拙)한 조형미는 바로 이런 연마의 결과다.
먹과 붓의 운용에서 글자의 점획.짜임새.배치까지 공간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한국 현대조각의 거장 김종영은 자기의 예술이 추사의 조형세계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세잔과 추사를 비교하기도 했다.
추사체는 탈속(脫俗)의 정신세계와 직결된다.
추사는 글씨와 그림을 동시에 구사한 '불이선란도'에서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만에 우연히 내 본성 안에 하늘을 그려냈다'라고 했다.
이런 '성중천(性中天)'의 경지는 내가 곧 부처임을 노래한 오도송이자, 유마의 '불이선(不二禪)'과 공자의 '유어예(遊於藝)'의 경지에 가깝다.
◆학예일치의 대 예술가=추사는 서예가 이전에 청대 고증학을 조선에서 꽃피운 경학(經學)의 대가이자 격조(格調) 높은 작품을 완성한 대시인이다.
청대 경학은 송명리학(宋明理學)의 주관적 학풍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했다.
청대에는 각종 유교 경전의 문자를 바로잡기 위한 교감학이 성행하면서 고대 금석문이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학문이 곧 예술이었던 셈이다.
추사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으로 시작된 고증학을 그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완원으로부터 배워 조선에 도입하고 '진흥이비고' '무장사비잔자고' 등의 우리 금석문은 물론 '계첩고' '천축고' '실사구시설' '역서변' '태극즉북극변' 등 경전.불교 등의 고증학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사실에 의거해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그래서 우리는 추사를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학예일치의 대예술가로 부른다.
◆19세기 동아시아를 평정=추사의 성취는 동시대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경지다.
서예사는 한마디로 글씨의 전형을 세운 왕희지를 재해석하는 역사다.
당나라 안진경, 원나라 조맹부, 명나라 동기창 등 중국 명필의 토대는 모두 왕법(王法.왕희지체)이다.
통일신라시대 왕법이 한국에 건너온 이후 김생.탄연.안평대군.한석봉.이광사의 등 국내의 명필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나 청대에 와서 왕법(王法)의 해석문제가 제기되면서 글씨의 근본을 왕희지 이전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른바 비각(碑刻)을 연구하는 비학이 등장했다. 비학은 글씨와 경학이 둘이 아님을 강조한다.
청대의 학풍은 추사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당대 청에서도 뛰어난 서예가가 많았지만 추사처럼 비학의 학문성과와 서예의 예술세계를 아울렸던 작가는 없었다.
일각에선 아직도 추사를 청조문화의 수입한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는 조선의 서예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중국 비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추사체라는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
요컨대 추사는 오늘의 화두를 빌리자면 시서화.문사철.유불선을 한 줄에 꿴 진정한 인문학자다.
그래서 지금 추사인 것이다. 세상을 통합하는 인문학의 원형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문화in] 추사의 작품 값은? 부르는게 값 세한도 최소 50억원
[중앙일보 박정호] 예술도 예술이지만 추사의 작품은 대체 얼마나 할까.
취향.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고, 값도 들쭉날쭉 하는 게 예술품의 생리지만 추사는 단연 한국 고미술 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작가다.
예컨대 '세한도'가 인사동에 나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부르는 게 값'이 정답이다. 서지학자 김영복씨는 "최소 50억원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웬만한 중소기업의 1년 매출액과 맞먹는 액수다.
현재 전해지는 추사의 작품은 대략 600여점. 개인.해외 소장품도 많아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다.
300~400편으로 추정되는 서간(書簡.편지)까지 포함한 숫자다.
비교적 작은 작품인 추사의 편지는 미술시장에서 500만~10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실제로 올 4, 6월 서울옥션에 나온 추사의 행서(行書) 편지는 각각 550만원, 600만원에 낙찰됐다. 김영복씨는 "작품성을 인정받으면 3000만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대련(對聯.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대구)이나 현판(縣板) 등 큰 글씨로 쓴 작품은 1억원 가까이 한다.
올 2월 서울옥션에선 추사의 칠언시 대련이 8400만원에 경매됐다.
추사가 정통했던 예서(隸書) 작품은 다른 서체보다 두 배 높게 받을 수 있다
[문화in] 추사체 탄생은 '대하 드라마'
[중앙일보] 추사체는 기괴.고졸의 조형미를 특징으로 한다.
평범한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깔끔한 글씨에 익숙한 사람은 당황할 수 있다.
추사체는 일종의 대하 드라마다.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꿰뚫어야 한다.
추사의 글씨는 비교적 엄정했던 20, 30대의 도입기, 40대의 과도기, 그리고 파격과 개성의 아름다움을 구현혔던 말년의 서풍(書風) 사이에 적잖은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 베이징에 갔던 추사는 중국인 스승 옹방강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왕희지.구양순으로 대표되는 정법(正法) 서체 외에 옛 한나라 비석에 새겨진 예서체, 즉 왕희지 이전의 서체를 알게 됐다.
추사는 40대에 한나라 예서와 함께 구양순 중심의 당나라 해서 공부에 매진한다.
그리고 추사체의 골격이 된 엄정 단아한 정법(正法)을 체화하게 된다.
요컨대 추사는 한나라 예서에서 진수를 얻었지만, 생애 전시기를 통해 왕희지 이래 중국 명필들의 서체에도 정통했다.
추사체의 탁월한 경지는 추사가 중국 각 시대의 서체를 완전히 습득했기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추사체의 실체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흔히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추사의 생애와 연결해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24세 때의 연행(燕行)과 55세 때의 제주 유배가 그의 생애에 분수령이 된 건 분명하나 서체의 변모와 그대로 일치하는 건 아니다.
연행이 추사가 글씨를 공부하는 데 방향을 돌린 계기가 됐지만 작품에 본격 반영된 건 30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제주 유배 이전인 40대 중반에도 추사체의 징후가 포착되며,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는 시기 또한 60대 말 과천 시기다
[문화in] '글로벌 지식인' 추사의 향연이 펼쳐진다
[중앙일보 박정호] 2006년 가을 '추사(秋史) 바람'이 몰려온다.
바람의 위력은 거의 태풍급이다.
29일 경기도 과천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추사 글씨 귀향전'을 신호탄으로 내년 초까지 추사를 다룬 대형 전시가 무려 5개나 어어진다.
'추사 일색'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왜 추사인가.
올해는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타계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기일(음력 10월 10일)을 기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캘린더성' 기획? 대답은 '아니오'다. 2006년 '한류열풍'과 '인문학의 위기'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한국의 문화지형도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된다.
추사는 잘 알려진 대로 당대 중국학자들이 선망했던 스타 작가이자 중국이란 '선진국'의 학문을 한국화한 글로벌 지식인이다.
전시 또한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예술의전당 등 한국의 대표적 문화기관이 기획했다.
추사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공개되는 셈이다.
타계 사흘 전에도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 글씨를 썼던 추사에 한번 푹 빠져보자. 어떤가. 올 가을이 기대되지 않는가.
'소문난 집에 먹을 게 없다'고 한다.
허장성세(虛張聲勢)를 경계한 말이다.
그러나 올 가을을 화려하게 물들인 추사 관련 전시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소문난 전시에 볼 게 많다'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전시만이 아니다.
19세기 한국과 중국의 문화를 연결했던 추사의 세계성을 고민해야 한다.
멋진 작품을 즐긴 다음 찾아오는 예술적 포만감도 좋지만 그 뒤에 숨겨진 추사의 시대정신을 읽어야 한다.
사실 추사는 '한류의 원조'로 평가된다.
일본 학자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며 배우 배용준이 일본 여성을 매료시켰다.
이와 같은 일이 18세기 말~19세기 초 중국 베이징에서도 일어났다.
김정희는 청조문화의 진수를 체득해 중국인도 열광시켰다"라고 말했다.
시대정신의 핵심은 국제화.세계화다.
예컨대 추사는 당대 서울과 베이징의 중심에 서 있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고 국제적 흐름에 둔감했던 당대의 많은 사대부와 달리 추사는 일찍부터 청조의 고증학(考證學)에 눈을 뜨고, 조선에 실학 기풍을 진작시킨 실사구시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오죽하면 그의 사후에도 그의 글씨를 보내달라는 중국 학자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을까. 5개 특별전의 키워드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경기도 과천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추사 글씨 귀향전:후지쓰카 기증 추사 자료전'은 추사의 국제성을 한눈에 확인하는 자리다.
추사 연구의 선구자였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가 소장했던 유물 1만여점을 그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가 올해 과천시에 기증한 것 가운데 '고갱이' 100여 점을 추렸다.
추사가 그의 두 아우와 제자인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26건이 처음 공개된다.
하이라이트는 당대 한국과 중국의 학자가 주고받았던 서책이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일제시대 서울.베이징에서 양국의 교류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했다.
청나라 학자가 조선의 학자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청대학자서간첩', 추사가 베이징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 중국 학자들이 추사에게 열어준 잔치를 그린 '증추사동귀시도임모', 총 680책에 이르는 청대 고증학의 정수인 '황청경해' 등 귀중한 사료가 대거 선보인다.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기획했다.
'세한도''불이선란도' 같은 명품 90여 점이 출품된다.
도록으로만 소개됐던 '잔서완석루'도 처음 나온다.
추사의 동반자였던 김근유.권돈인.초의선사의 작품, 추사의 스승이었던 중국 학자 옹방강의 편지, 추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후학들의 서예.회화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국립제주박물관(12월 4일~2007년 1월 21일)으로 이어진다.
'명선' '선개비불' 등 추사의 걸작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간송미술관도 특별전을 연다.
총 100여 점이 소개된다. 올 5월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62) 선생의 탄신 100돌 기념 특별전을 열었던 미술관 측은 추사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미술관을 40년간 지켜온 최완수 연구실장은 "시.서.화 전반을 망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미술관 리움도 장승업.허련 등 대가들을 재조명하는 '조선말기 회화전'에서 추사의 글씨를 모은 특별실을 따로 마련한다.
예서(隸書)로 쓴 '죽로지실''유천희해' 등과 추사의 영향을 받은 이한철.노희룡.허련.이하응 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은 연말 추사 특별전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 글씨.그림.전각.한중교류.추사서파.경학.불학 등 10개 분야에 걸쳐 총 200여 점이 나온다.
추사가 어머니.할머니 등에 보낸 한글 편지도 첫 선을 보인다.
19세기 중국에는 '완당 바람'이 불었다.
추사의 작품을 구하려는 중국인의 열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21세기 초반에 불어닥친 '추사 바람'이 우리 문화계에 어떤 충격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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