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삶

아치울잡초 2008. 5. 7. 10:10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 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 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 ‘토지’의 서문 몇 토막


한국 문학의 거목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문학을 일구었던 토지가 무너졌다. 지난달 4일 뇌졸중과 지병 악화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매단 채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5일 뇌졸중 등 합병증으로 결국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 박경리 선생은 그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 지난해 7월 폐암에 걸렸다. 하지만 고인은 토지의 작가답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다. 우리 민족의 ‘토지’로 남아 우리 곁을 영원히 지킬 것만 같았던 박경리 선생이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막상 떠나고 보니 서운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유언에 따라 고향 통영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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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에서 표현하는 박경리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그려낸 문제작을 발표했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를 완결지었다.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6·25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각종 소설 유형을 종합해놓은 듯하다. 전쟁소설, 이데올로기 소설, 지식인 소설, 빨치산 소설 등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주인공 '하기훈'을 중심으로 그와 석산(石山) 선생, 그와 장덕산 사이의 이념갈등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볼 경우 이데올로기 소설에 가깝고, 제2부만 따로 보면 빨치산 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의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장편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波市〉의 주요인물도 여성이다.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이 나오는 반면에 〈파시〉에는 6·25전쟁 직후에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과 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私小說)이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하소설로서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배경으로 했으나 역사소설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또 이 작품은 몇몇 제한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평사리'와 '간도'의 주민들 전체를 다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곧 작가의 시점이나 화법이 자유롭고 선악관에 의해 인물이나 상황 및 사건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로이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