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쯤 되었을까?
강진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을 전체가 흰 눈에 덮인 순백의 모습이었다.
그때 우연히 눈 길 위에 펼쳐지던 꽃상여 행렬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그 광경
펄럭이며 앞서 가던 만장,
순백의 눈길위의 원색의 꽃상여 행렬
종소리에 섞여 들리던 슬픈 곡소리
검은머리, 흰 소복, 흐느낌.......
마을을 몇 바퀴 돌고 나가던 그 상여행렬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서 그런 모습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여행길을 떠나면 우선 강진을 빼놓지 못하고
이번 여행도 강진, 해남, 완도, 청산도
그리고 “함평해수찜”에서 여독을 풀고 올라 왔다.
< 다산초당 >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툇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여 유배객 다산이 살던 草堂(초가집)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중에서 뽑아 그것을 본떠 새긴(模刻) '다산초당' 현판 아래의 마루는 답사객들의 쉼터가 된다. 초당에 김정희의 흔적이 하나 더 있는데 "寶丁山房"이라는 현판글씨가 그것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로서 학문적으로 다산을 사모하였던 추사가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초당 연못 옆으로 조그만 기와집이 하나있는데 바로 동암이다. 일명 '송풍암 松風庵'이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선생이 거처하며 방대한 저술을 하였던 바로 그곳으로 다산의 글씨 중에서 뽑아내 模刻한 행서체의 '다산동암 茶山東菴'이라는 현판이 먼길을 온 길손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자신의 회갑년에 지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묘지명(自撰墓地銘)에 의하면 당시 초당의 모습은 이러했다.
"무진년(1808) 봄 다산으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다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줄을 맞춰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東菴과 西菴 두 초막을 짓고 천여권의 장서를 두고 저술을 하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살았다"
비좁고 습한 강진읍에서의 7년여 동안의 생활에서 초당으로 이사 와 심정적으로 안정이 된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4가지 경치를 가꾸고 이를 '다산사경 茶山四景'이라 이름하였다.
'다산' 이곳은 정약용이 기거하기 전부터 차밭이 만산(滿山)하여 [다산]이라고 불렸다는데 그가 '사암'에서 '다산'으로 改號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차나무를 근처 여러 산에 이식을 하여 그 후 이곳 차는 오랫동안 명물이 되었다. 처사 윤단의 아들인 윤구로(橘園 尹奎魯) 등 3형제가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고 해남의 외가쪽 사람들은 尹孤山이래 家傳되어오던 천여권의 장서를 제공하였다. 다산초당이 다산학의 산실로 된 데는 이렇게 외가 쪽 두 집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초당으로 이주하고서 비로소 다산은 마음놓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눌린 자의 억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하여 수많은 저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 다산은 여기서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쳐 모두 학자로 키웠다. 원래 15,6평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0년대에 폐허화했는데 1959년 해남윤씨의 주도로 결성된 '정다산유적보존회'에 의해 우선 초당이 복원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강진군이 중심이 된 '다산유적복원위원회'에 의해 다산 동암과 서암, 유적비 등이 복원 · 건립되었다. 초당 동편 백련사로 가는 길목 잔등은 흑산도에 있는 약전 형과 고향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이런 선생의 심회를 되살리기 위해 그 자리에 천일각을 지었다. 천일각에 앉으면 다산이 뱃놀이와 고기잡이로 시름을 잊었던 구강포(九江浦)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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