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作談論/虛作談論

우리집 가훈

아치울잡초 2011. 11. 9. 14:24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었다.

돌림자가 바를 정(正)자 라서 며칠을 두고 생각하다가 바를 정(正), 길 도(道), 즉 정도(正道)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바른 길로 가거라,

애비는 바른 길로 걸어오지 못했으니 너만큼은 바른길로 가야한다라는 희망 섞인 주문이 담긴 작명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의 아버님께서는 강력한 항의를 해 오셨다.

아버님은 나에게 ‘ 네 이름 누가 지었는지 아느냐?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이다.’라시며

아이의 작명 권한은 그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라고 작명에 관한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시며 섭섭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곧 둘째를 안겨 드릴 터이니 그때는 아버님께서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라며 아버님을 위로 하였고 래서 우리 딸의 이름은 아버님께서 ‘신애(信愛)’라고 지어 주시게 되었다.

 

아들 녀석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는 숙제를 받아 왔었다.

나는 아들 녀석 교육도 시키고 내 서예솜씨도 자랑할 겸 거창하게 일을 시작했다.

‘아빠가 붓글씨로 멋지게 가훈을 써 줄 테니 네가 먹을 좀 갈아라,’

나는 아들 녀석에게 먹 가는 요령을 알려주며 그 일을 시켰다.

어린 녀석에게 한 번도 안 해 보았던 먹 가는 일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몸을 비비꼬면서 자세를 바꿔가면서 이제는 다됐냐고 자꾸 재촉했지만 나는 먹 가는 일을 계속 시켰고

아들 녀석은 본인 숙제를 도와주는 일이니까 별 수 없이 먹물 농담이 적당해 질 때까지 즉 내가 오우케이 할 때 까지 힘든 일을 계속했었다.

 

나는 몇 번 연습을 한 후 화선지에 우리 집 가훈을 쓰기 시작했다.한자로 ‘正道’라고 해서체 정자로 큼지막하게 썼다.

‘옛다, 우리 집 가훈이니 선생님께 갖다 드리거라'

앞에 써 놓은 글씨를 잠시 바라보던 아들 녀석이

‘아빠 이거 내 이름이잖아? 누가 내 이름 써 달랬어?

가훈 써 달라니까!’

초등학생이었지만 본인 이름은 한자로 익힌 터였기 때문에 내가 쓴 글씨를 알아보고 강력하게 항의를 헸었다.

나는 ‘정도(正道)’라는 글이 이름으로도 쓸 수 있고 또 가훈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을 아들 녀석에게 하려고 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설명은 잘 안될 수 밖에 없고 역부족이란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집 가훈을 어떻게 써줄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또 한자로 또박또박 썼다.

해서체 정자로 큼지막하게 ‘신애정도 信愛正道’ 라고

그리고 아들녀석에게

‘信愛正道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바른길로 가라는 뜻’이다.

‘우리 집 가훈이니 선생님께 갖다 드리거라!’

직접 쓴 내가 봐도 상당히 정성이 밴 반듯한 글씨였다.

자기 이름자가 들어가고 또 동생 이름자도 들어가고 뭔가 좀 찜찜했지만 아들 녀석은 나와 더 실강이 하는 것이

별무소용이라 판단하고 먹물이 마른 후 책가방에 챙겨 넣었다.

 

다음날 학교 갔다 돌아오더니 아들 녀석 얼굴은 의외로 환했었다.

‘아빠! 가훈숙제 선생님께 냈더니 선생님이 아빠에 대해서 자꾸만 물어 보시데?’

‘아빠 뭐하시는 분이냐? 연세가 몇이시냐?......’

아들 녀석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스럽고  훌륭하신 학교 선생님.

반면에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 엄마와 가끔 다투시고 집에서는 꼬질꼬질 하신 결코 존경스럽지 않고 훌륭하지 않으신 아빠,

그런 별 볼일 없는 아빠를 학교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호의적인 말투로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일은 참 희한한 일이라는 표정이고 아들 녀석이 별 볼 일 없다고 단정지어버린 아빠가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 관심을 받는걸 보면 아빠에게 자기가 모르는 뭔가가 조금은 있는가보다 라고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 한 동안 아들 녀석은 나에게 따뜻하고 존경스런 눈길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사이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그때 그 선생님께서 우리 집 가훈을 보시고 아이에게 보여주신 아빠에 대한 호의적인 말투,

아마 지금도 아들 녀석이 작게나마 아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존경심의 대부분은 우리 집 가훈을 보시고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보여주셨던 아빠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의 표명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집 가훈이 바뀌었다. 본래대로 짧고 강하게

‘正道’ 바를 정, 길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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