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詩絶句感賞2
出塞 王昌齡
秦時明月漢時關, 萬里長征人未還.
但使龍城飛將在, 不敎胡馬度陰山.
변방을 나서며
秦나라 시절의 밝은 달과 漢나라 때의 관문,
만리 멀리 전쟁 나간 사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龍城의 날랜 장수만이 있었더라면,
오랑캐 말이 陰山을 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을.
王昌齡은 盛唐代의 시인으로서 특히 七言絶句 분야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칠언절구 분야에서 王昌齡은 흔히 李白과 병칭될 정도로 문학사상 튼튼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 ≪出塞≫ 시는 여러 평자들에 의해 칠언절구의 압권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체 二首로 되어 있는 출새시의 첫째 수에 해당하는 이 시는 수백년 동안 변방에서 죽어 돌아가지 못한 병사에 대한 동정심과 오랑캐(흉노족)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있는 장수의 기용을 바라는 심정을 적은 것이다.
첫 구에서는 한폭의 웅장한 '關城夜月圖'를 생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늘에는 밝은 달이 외롭게 떠있고, 지상에는 육중한 관문이 침묵하며 서있다.
이 황량한 대지 위에는 수천 수만 명의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다.
관문에서 밝은 달을 바라보던 시인은 달빛을 타고 은하를 거슬러 올라 秦나라 시절로, 漢나라 시절로 돌아간다. 시인은 집을 멀리 떠나 이 곳 관문을 지키고 있는 漢나라 병사를 보게 된다.
시인은 또 더 멀리 秦나라 시절 고향을 떠나 만리 밖에서 수자리 보던 병사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 어린 눈으로 달을 쳐다 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달빛은 그 얼마나 밝았던가!
그리고 그 어둑한 관문 위에서 달을 보던 병사들은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었던가!
밝은 달은 열림이며, 돌아가고 싶은 이상이다.
그러나 육중한 관문은 닫힘이요,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둥그런 달은 보고 싶은 가족들과의 만남을 상징하지만 침묵하는 관문은 그러한 소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철저한 분리와 외면을 표시한다.
그래서 다음 구의 '만리 멀리 전쟁 나간 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秦나라 병사나 漢나라 병사들은 물론 지금의 수졸들도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은 秦漢 이래의 인민의 공통된 비극이 되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사람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파괴이며, 절망이며, 죄악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한 파괴적인 세계, 절망적이며 죄악스러운 세계를 구원할 방도를 찾는다.
'未還(아직껏 돌아가지 못함)'의 세계에서 '可還(돌아갈 수 있음)'의 세계로 전환시킬 방도를 찾는다.
시인의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飛將 李廣이다.
漢代의 장수였던 李廣은 흉노족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명성을 드날렸고, 그가 변방을 지키고 있는 동안은 흉노족은 남하를 시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자리 보던 병사들은 그들의 복무 연한을 마치고 무사히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한나라 시절만 훌륭한 장수가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李廣과 같은 훌륭한 장수들이 지금도 존재할 것이고, 조정이 그러한 장수들을 기용하여 변경을 지키게 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가깝게는 현재의 변방을 책임지고 있는 장수의 무능을, 멀리는 적절치 못한 인사정책으로 무모한 희생만 강요하는 현 조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즉 고대 영웅에 대한 찬미와 흠모는 현재의 무능한 변장과 어리석은 조정에 대한 불만의 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龍城과 陰山은 모두 북쪽 변경 일대에 있는 곳이다. 龍城은 漢代에 右北平郡 소재지였고, 陰山은 지금 내몽고 지경에 있는 곳이다.
采蓮曲 王昌齡
荷葉羅裙一色裁, 芙蓉向 兩邊開.
亂入池中看不見, 聞歌始覺有人來.
연을 따는 노래연잎과 비단 치마는 한 색으로 마름질되어 있고,
연꽃은 뺨 양 옆을 향해 피어 있어라.
어지러이 연못 가운데로 들어가니 보이지 않더니,
노래가 들려 비로소 사람이 와 있음을 알겠구나.
이 시는 연을 따는 아가씨의 경쾌하고 활발한 생동적인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앞 두 구는 연을 따는 아가씨와 연꽃이 하나로 융화되어 있음을 그리고 있다.
芙蓉은 연꽃의 다른 이름이다.
연을 따는 아가씨의 치마가 연잎과 같은 초록이어서 치마와 연잎이 마치 같은 색깔의 비단으로 마름질한 것 같다.
연을 따는 아가씨의 얼굴이 연꽃들 사이에서 서로 어울리어 마치 곱디 고운 연꽃들이 아가씨의 볼을 향해 피어 있는 듯 하다.
아가씨의 비단 치마가 연잎처럼 푸르러 아름답고, 아가씨의 얼굴은 연꽃과 똑같이 붉고 윤기가 난다.
연을 따는 아가씨는 바로 아름다운 대자연의 일부분이다. 어쩌면 연꽃의 요정인지도 모른다.
뒤 두 구는 노래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연을 따는 아가씨가 연못 가운데로 들어가니 연잎, 연꽃과 한 덩어리가 되어 사람과 꽃이 구분이 되지 않게 되었다.
연잎과 비단치마, 연꽃과 얼굴이 황홀하게 하나가 되어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갑작스레 연꽃 가득한 연못 중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비로소 연못 가운데 연을 따는 아가씨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둥근 연잎과 요염한 연꽃이 현란한 연못에서는 청춘의 활력이 가득차있는 연을 따는 아가씨들의 즐거운 노래소리만 가득 울려올 뿐이다.
이 시는 매우 독특하고 우아하며 아름답다.
연을 따는 아가씨를 미려한 대자연과 일체로 융화되게 그리고 있고, 소재를 생활에서 찾았으므로 진실하며 핍진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으로는 짙은 동화적 색채까지도 띄고 있으며, 대구에 집착하지 않고 구어적 표현들을 그대로 살림으로써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閨怨 王昌齡
閨中少婦不知愁, 春日凝 上翠樓.
忽見陌頭楊柳色, 悔敎夫 覓封侯.
규중의 원망
규중의 젊은 아낙 근심이란 걸 몰라,
봄날 화장을 짙게 하고 푸른 누대에 올랐더라.
홀연 밭두덕의 버들 색을 보더니만,
지아비 공명을 찾으라 보낸 것을 후회한다네.
이 시는 젊은 부인이 봄을 맞아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적은 것이다.
시의 앞 두 구에서는 화장을 짙게 하고 누대에 오르는 젊은 부인을 묘사하고 있다.
작자는 젊은 부인의 '不知愁(근심을 모름)'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봄날의 아침, 젊은 부인은 곱게 단장을 하고 자신의 집에 있는 높은 누대에 오른다.
봄날에 화장을 하고 누대에 오르는 것, 바로 이것이 '不知愁'의 구체적인 증거이자, 형상이다.
그녀가 이렇게 화장하고 누각에 오른 것은 아무런 근심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봄경치를 감상하여 즐기고자 함이었다.
봄날에 짙게 화장을 하고 누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갓 시집온 젊은 아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별리의 아픔과 생활조차 허덕거리게 할 정도의 그리움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는 여인이었더라면 봄날 누대에 오르는 일을 서슴없이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不知愁'는 쉽게 말해서 아직 철이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철없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경쾌하고 활발한 면이 있어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생동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少婦(젊은 부인)'과 '不知愁(근심 없음)', '春日(봄날)'과 '凝 (짙게 화장함)'과 '翠樓(푸른 누대, 혹은 화려한 누대)'는 그 얼마나 잘 어울리며 그 얼마나 생명력이 충만한가!
뒤 두 구절에서는 젊은 부인의 그리움을 적고 있다.
즉 '不知愁'의 상태에서 '知愁(근심을 알다, 철이 들다)'의 상태로의 전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철 모르는 젊은 아낙이 한없이 즐겁기만 한 마음으로 화려한 누대에 올라 여전히 그 철 모르는 즐거움으로 봄날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저만치에 꽃이 피어 있고, 새가 분주히 날아다닌다.
멀리에 봄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밭일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두런두런 꿈결처럼 들려온다.
홀연 밭두덕 언저리에 버드나무가 보였다.
봄을 맞아 한껏 물이 올라 푸르러진 버드나무가 이 철없는 젊은 아낙의 시선을 끌어 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봄을 맞아 한껏 탱탱한 젊음으로 터질듯한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오른 그 버들은 봄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갓 시집온 젊은 아낙의 싱그러운 모습이 인생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버들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 젊은 아낙은 더 이상 철이 없는 모습일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이 버들의 그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인생의 봄을 맞아 아침 햇살같은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해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대상으로서의 남편은 멀리 공명을 찾아 떠나 있다.
이내 후회가 따른다.
남편이 공명과 부귀를 얻기 위하여 군대를 따라 멀리 간 것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覓封侯'는 종군하여 공명과 부귀를 찾는 것을 가리킨다.
누대를 오르기 전의 마음 상태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된다.
즉 이제서야 철이 든 것이다. 이 뒤 두 구절은 '楊柳色'과 '覓封侯'로 서로 직접적으로 대를 이루고 있다.
이 두 시어를 가지고 말을 재미있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본 시에서 젊은 아낙은 '楊柳'를 매개로 하여서 '不知愁'에서 '知愁'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楊柳'는 '知愁'의 필연적인 경로이다.
거꾸로 말해서 사람이 '知愁'하려면 '楊柳'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 환언하면 '封侯'만을 추구하느라 아직도 '楊柳'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 '不知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명과 부귀에만 집착하여 세상에 봄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철이 없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더 재미있게 말하자면 돈벌이에 급급하느라, 혹은 공부에 전념하느라 좋은 시절에 푸른 버들 같은 이성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은 역시 '철이 안든' 상태라는 말이다.
王惟
空山不見人, 但聞人語嚮.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鹿柴에서
빈 산엔 사람 보이지 않는데,
사람 말소리 울리는 것 들린다.
지는 햇빛 깊은 숲으로 들어와,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친다.
이 시는 저녁무렵 어둡고 적막한 빈 산의 경치를 묘사한 것이다. 이 빈 산은 鹿柴(록채) 부근에 있는 산이다. 록채는 작자 왕유가 삼십여년간 반은거 상태로 지냈던 輞川이라는 곳의 한 지명이다.
시의 앞 두 구에서는 고요함을 적고 있다. 빈 산의 사람 소리이다. 공활한 산림에는 사람 자취는 하나도 볼 수가 없다. 일체가 모두 숨을 죽였다. 소리 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때 사람들의 말소리가 한바탕 전해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말소리는 빈 산의 적막을 깨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 적막을 더욱 강화시킨다. 국부적인, 잠시적인 '울림'이 오히려 전체적이면서 영원할 듯한 적막감을 더욱 드러낸다.
뒤 두 구에서는 어두움을 적고 있다. 깊은 숲속은 본래 어둡다. 수풀 사이 나무 아래의 푸른 이끼는 깊은 숲속이 햇빛을 받지 않는 상황을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返景'은 태양이 지평선에 진 이후에 반사되어 나오는 햇빛이다. 저녁 무렵 반사되어 비치는 태양 광선이 나뭇잎을 통과하여 숲속 깊은 곳까지 비쳐 어른어른 푸른 이끼를 비친다. 잠시 어두운 깊은 숲속은 밝아지고 따사로와 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작은 한 줄기 빛은 깊은 숲속의 끝없는 이 어두움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오히려 숲속의 어두움으로 하여금 더욱 어둡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한 가닥의 남은 빛이 깜빡 지나가버린 후에는 이어 편만하게 그리고 길게 다가오는 것은 어두움이다.
이 시는 소리로써 적막함을 드러내고, 빛으로써 어두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적막함과 어두움이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이 훨씬 더 짙게 된다. 이것은 바로 시인 王維가 화가요, 음악가였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화가의 색채에 대한 민감함과 음악가의 소리에 대한 민감함이 바로 빈 산에 전해지는 사람의 말소리와 깊은 숲속을 비치는 낙조를 찰나적으로 포착하여 시화함으로써 특유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竹裏館 王維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竹裏館에서홀로 그윽한 대나무 속에 앉아서,
금을 타며 또 길게 휘파람을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