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白의 생애와‘月下獨酌’
중국 당대(唐代 701~ 762)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생애
제1기(출생~25세)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2기(25~42세)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했다.
맹호연(孟浩然:689~740)과의 교제도 이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산둥의 추라이 산[徂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제3기(42~44세)
742년(天寶 1) 가을 처음 장안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저명한 태자 빈객 하지장을 만나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그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것은 이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이 이때 나왔다.
조정에 나가는 일은 누구보다도 이백 자신이 희망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궁정시인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로 인해 744년 장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백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굴절된 고독감을 느꼈다.
이 3년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다수의 작품과 다양한 체험으로 수놓아진 중요한 시기였다.
제4기(44~56세)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뤄양[洛陽]에서 두보(杜甫: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이 만남으로써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흥미가 깊은 시기이다.
다만 상호 영향관계에 있어서 두보가 이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관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의 나이차와 그 시점에서의 명성과 역량의 차이라는 일반적인 원인 외에도 같은 시대의 시인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백은 동시대의 시인을 언급한 시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두보는 같은 시대의 시인을 읊조린 경우, 그 시인의 작시 기량과 자질을 칭찬한 작품이 많다.
두보 및 고적(高適:702경~765)과의 직접적인 교유는 6개월 내지 1년 반 정도로 끝나고, 이백은 양쯔 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완전한 방랑생활은 아니었으며, 양원(梁園)과 산둥 성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었다.
장안에서 추방된 후 약 10년간의 이 시기가 제2차 방랑시기이다.
제5기(56~62세)
755년(天寶 14)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12월 뤄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肅宗]가 영무(靈武)에서 즉위했다.
당시 이백은 양쯔 강을 따라 선성(宣城)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루산 산[盧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기 위해 참가했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영왕의 군대는 적군(賊軍)으로 간주되었고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도 체포되어 심양(潯陽] 주장시[九江市])의 감옥에 갇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단 석방되었으나, 대역죄가 추가되어 결국 멀리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북부)으로 유배되었다.
759년(乾元 2년) 3월 이백은 야랑으로 가던 도중 양쯔 강 상류의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사면 통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자유을 얻은 이백은 양쯔 강 중류의 둥팅 호[洞庭湖] 부근에서 시인 가지(賈至:718~772)를 만난 뒤 강남의 온화한 풍토에서 지냈다.
762년 62세의 이백은 당도(當塗)의 현령이었던 족숙(族叔)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구당서 舊唐書〉에는 여러 해에 걸친 과도한 음주가 그 원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그해 11월 무렵 이양빙의 손에 시문의 초고를 맡기고 죽었다.
수군에 참가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양쯔 강에서 보낸 6여 년의 기간을 만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품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행·이별·음주·달빛·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때문에 이백의 작품에는 각 제재의 기본적인 성격이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1,000여 년에 걸친 이백 시의 읽기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시사'(詩史)로 불리는 두보의 시집이 대체로 제작연대로 배열된 데 비해, 이백의 시집은 각 시대를 통해 오로지 제재로 구분된 '분류본'이 중심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작품의 제작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외적 조건이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두보의 시와는 달리 개별 작품의 창작 상황을 사상(捨象)시킨 일반적인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과 제작연대가 불확실하더라도 작품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등이 내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이백 시의 주요한 제재를 보면, 공통된 발상으로서 시공감각의 확대에 대한 지향, 미확정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2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의 시에서
보이는 아득히 먼 시공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 이별의 시에서 보여지는 장래를 알 수 없는 흔들리는 심상(心象)의 상태, 음주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수용하기 힘든 고양감, 심적 세계의 확대, 순간의 영원화, 광대 또는 영원한 시공에서 미지의 세계인 밝은 달빛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설정된 신선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자유로운 비상 등
가장 이백적인 감각을 지닌 제재들 외에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규원(閨怨)의 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노래하는 변새시, 역사를 장식한 장대한 드라마를 미미한 인간세계의 한순간의 꿈으로 노래한 회고시 등
이백은 다른 시인과 더불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두보·한유(韓愈:768~824)·백거이(白居易:772~846) 등이 이룩한 시사(時事)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 서사적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 또는 시에 의해 인생과 자연계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 등은 이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두보와 한유는 이백의 대표적 제재인 이별에서는 그리 저명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에는 미숙했으며, 특히 7언 율시에서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볼 만한 작품이 없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 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 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백거이 작품은 비교적 균형 있는 분포를 보인다.
또 한유의 대표작에는 장편 고체시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또 그의 대표작 중 7언절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결국 이 시형이 가진 표현기능의 존재방식은 이백에게 있어서 시적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물상
이백이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전기자료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그는 당시의 시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장안에서의 방만한 생활과 영왕의 수군에 참가했을 때의 낙관성에서 보여지듯이, 정치가로서는 그리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현종이나 영왕 또는 지방의 유력자들도 시인으로서의 이백이 자신의 궁정이나 막하에 있기를 바랐으며,
그에게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이백은 정치적으로는 평생 불만이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는 심경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실패는 시인 이백에게 더욱 많은 시간과 의욕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과 다원적인 시각을 제공했다.
만약 그가 장안에서 궁정시인으로서 성공하고 관리로서 출세했다면, 많은 군중시와 응소시(應詔詩)의 명작을 낳기는 했겠지만, 자유롭고 변화가 심한 이백의 시세계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결국 재야의 시인으로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국문학사 측면으로서는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의 사상과 시풍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비평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테면 도교적·유교적·낭만적·고전적·정열적·객체적·쾌락적·민요적·애국적 등등, 거기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요소가 지적되는 것도 별로 신기할 바가 없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이만큼 평가가 다양한 예도 드물다.
그의 자유로움과 변환성은 이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작품 전체가 어느 한 가지 기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또는 다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山中問答 李白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문여하사서벽산 소이부답심자한
도화유수묘연거 별유천지비인간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山中與幽人對酌 李白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卿且去 明朝有意抱琴來
양인대작산화개 일배일배부일배
아취욕면경차거 명조유의포금래
둘이서 술 따르니 산유화 피고 한 잔 또 한 잔 다시 또 한 잔
취했으니 자려네, 그대는 갔다가 내일 아침 내키면 거문고 안고 오게나.
月下獨酌(其一) 李白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傀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聖賢旣已飮 何必求神仙
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
俱得醉中趣 勿謂醒者傳
천약불애주 주성부재천 지약불애주 지응무주천
천지기애주 애주불괴천 이문청비성 부도탁여현
성현기이음 하필구신선 삼배통대도 일두합자연
구득취중취 물위성자전
하늘이 술을 즐기지 않는다면 술별이 하늘에 있지 않으리라.
땅이 술을 즐기지 않는다면 땅에는 술샘이 없어야 하리.
하늘과 땅이 술을 즐기나니 술을 즐김은 부끄럽지 않네.
내 들으니, 청주는 성자요 탁주는 현자라 말하더군.
성인과 현인을 다 마셨는데 신선을 구하여 무엇 하리오?
석 잔이면 대도를 꿰뚫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 되지.
취하여 이른 경지일랑 모두 깨어있는 자에겐 말하지 말라.
月下獨酌(其二)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排徊 我舞影凌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影結無情遊 相期邈雲漢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월기불해음 영도수아신 잠반월장영 행락수급춘
아가월배회 아무영능란 성시동교환 취후각분산
영결무정유 상기막운한
꽃 사이 놓인 한 동이 술을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시네.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
달은 전부터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 부질없이 흉내만 내는구나.
한동안 달과 그림자 벗해 행락은 모름지기 봄에 맞추었다.
내가 노래하니 달은 거닐고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 어지러워
깨어서는 모두 같이 즐기고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길이 무정한 놀음 저들과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
장진주(將進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군불견황하지수천상래)
奔流到海不復回 (분류도해불부회)
君不見高當明鏡悲白髮 (군불견고당명경비백발)
朝如靑絲暮成雪 (조여청사모성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복래)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涔夫子 (잠부자)
丹丘生 (단구생)
將進酒 (장진주)
杯莫停 (배막정)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鍾鼓饌玉不足貴 (종고찬옥부족귀)
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古來聖賢皆寂寞 (고래성현개적막)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류기명)
陳王昔時宴平樂 (진왕석시연평락)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徑須沽取對君酌 (경수고취대군작)
五花馬 (오화마)
千金裘 (천금구)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 보이지 않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바다로 치달려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그대 보이지 않는가, 화려한 집 거울에 비친 슬픈 백발을
아침엔 푸르고 싱싱하더니 저녁엔 눈처럼 변했구나.
사람이 태어나 뜻을 얻으면 즐거움을 다 누려야 하나니
술잔으로 하여금 덧없이 달만 쳐다보게 하지 말지라.
하늘이 내 재능을 낳은 건 분명 쓸모가 있기 때문이고
많은 재물은 다 써버려도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
양 삶고 소 잡아 즐거움을 누려보세
한 번 마시면 모름지기 삼백 잔은 마셔야지.
잠훈(涔勛)선생
내 벗 원단구(元丹丘)여
술을 마시세.
잔을 멈추지 말고!
그대들에게 노래 한 곡 들려줄 테니
귀 기울여 들어주시게.
화려한 악기 훌륭한 음식도 귀하다고 할 수 없고
그저 바라기는 오래도록 취해 깨어나지 않았으면!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적막해졌지만
오직 술 마신 사람만이 그 이름 남겼다네.
진왕이 옛날 평락궁에서 잔치 열 때는
한 말에 만 냥이나 되는 술 마음껏 마셨다네.
주인은 어이해 돈이 적다 말하는가?
어서 술 사와서 마주 앉아 마셔보세.
천하의 명마(名馬)도
최고급 여우털 옷도
하인더러 갖고 나가 좋은 술로 바꿔오라 하시게.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여버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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