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風水등/漢詩·漢文

杜甫의생애와 “曲江二首”

아치울잡초 2012. 3. 7. 23:04

 

 

 

曲江二首 (曲江二首, 其一) 杜甫

 

一片花飛滅却春 風飄萬點正愁人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脣

江上小堂巢翡翠 苑邊高冢臥麒麟

細推物理須行樂 何用浮榮絆此身

 

(일편화비감각춘 풍표만점정수린

차간욕진화경안 막염상다주입순

강상소당소비취 원변고총와기린

세추물리수행락 하용부영반차신)

 

曲江에서 (曲江二首, 其一) 杜甫

꽃 한조각 떨어져도 봄 빛이 준다는데

수만 꽃잎 떨어지니 슬픔 어이 견디랴

스러지는 꽃잎 하나 눈 앞을 스치는데

몸 이 상한다고 목 축일 술을 마다하랴

강가에 작은 집엔 비취 새 둥지 틀고

부용원 높은 무덤 기린 상 누워있네

만물 이치 따져 보면 즐기고 볼일 뿐

무엇하러 헛된 명예에 이몸을 얽메는가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시인.

 

 

두보

자는 자미(子美). 이백(李白 : 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만년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당 현종(玄宗)이 즉위한 해인 선천(先天) 1년(712)에 허난 성 궁 현에서 태어났다.

초당(初唐)의 이름높은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이기도 한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뤄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뤄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고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으며 연장자들과 교류를 즐겼다.

 

20세를 전후하여 8,9년간 각 지방을 유람했는데, 처음에 장쑤 성[江蘇省]과 저장 성[浙江省]을 여행하고

24세에 일단 뤄양으로 돌아왔으나 진사(進士) 시험에 낙제하고는 다시 여행길에 나서 산둥 성[山東省]과 허베이 성[河北省]을 유랑했다.

이때 명산대천을 보고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이 시기의 시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개원 28년(740), 29세 때 당시 산둥 성 옌저우[兗州]에서 관리로 있던 아버지 두한(杜閑)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는 두보 시 중 가장 초기의 것이다.

 

다음해 산둥 성에서 돌아와 평생의 반려자였던 부인 양(楊)씨를 맞아들였다.

안사(安史)의 난(755~763) 후에 지극히 궁핍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도 두보는 늘 부인과 함께 다녔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항상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는 애정이 넘치는 시를 짓곤 했다.

이즈음 그는 벌써 30세나 되었는데도 전도가 열리지 않은 탓인지,억압당하고 있던 정신이 때로는 대상을 찾아 날카로운 어조의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전대의 시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빈약하고 엉성한 내용을 수식어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천보(天寶) 3년(744),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이다.

 

천보 5년(746)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후 약 10년 동안 수도인 장안에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명사·고관의 집에도 드나들고 추천을 희망하는 시들을 짓기도 했고 몇 번인가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천보 10년(751) 〈삼대례부 三大禮賦〉를 바쳐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의 명을 받고 관리로 뽑힐 순서를 기다렸으나 결국 임용되지 못했다.

당대의 시인은 대체로 관계(官界)에의 진출을 원하고 정치참여를 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이는 시대적인 분위기이기도 했고 또 임용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세제민의 이상은 중국 지식인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두보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천자(天子)가 옛날의 요·순(堯舜)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어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해가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실제로 두보에게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은 두보를 "즐겨 천하의 대사를 논했지만 이상이 높고 실제적이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정치가로서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기고 또 초조해했다.

 

천보 13년에는 장마가 심하게 계속되어 기근으로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의 친척집 농가에 맡겼다.

다음해 처음으로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胄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正八品)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안을 출발해서 도중에 리산 산기슭에 다다르니 그곳 온천에는 정치에 싫증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조정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추위를 피해 와서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봉선현에 겨우 당도해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어 있었다.

이때 두보는 비분강개의 울분과 마음을 무겁게 덮쳐 누르는 서글픔을 강렬하게 호소한 장편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다.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산시 성[陝西省] 바이수이 현[白水縣]·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닝샤 성[寧夏省] 링우[靈武]에서 즉위한 숙종(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무렵 〈춘망 春望>〈월야 月夜〉〈애왕손 哀王孫〉〈애강두 哀江頭〉 등 많은 유명한 시를 지었다.

 

 대력 2년(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중풍·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시작(詩作)은 점점 많아졌다.

그는 산골짜기에 있는 고장의 열악한 기후와 친구도 없는 적막함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력 3년(768) 정월 중순경 또다시 배를 타고 싼샤[三峽]를 내려가 장링[江陵]으로 갔다.

그러나 장링에 와보니 남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어렵고 생활이 궁해져서 늦가을에 다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이때는 이미 발도 부자유스럽고 귀도 반쯤 먹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도 많아졌으며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이 없었다.

 궁안[公安]에서 당분간 머물다가 연말경에 악주(岳州)로 내려갔다.

칠언율시 〈등악양루 登岳陽樓〉는 이때 지어진 것인데 이 시의 웅대하고도 침통한 멋은 실로 최고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대력 4년(769) 1월 악주에서 배를 타고 둥팅 호[洞庭湖]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둥팅 호를 떠돌아다녔다. 그후 두보는 탄저우[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위를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이즈음의 시는 신세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들이 많아서 그의 궁핍한 정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해 4월 탄저우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난을 피해 샹장 강[湘江]을 거슬러올라가 천저우[郴州]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레이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

 레이양의 현령이 이 소식을 듣고 술과 고기를 보내주자 두보는 감격해서 감사의 시를 지어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건강이 회복될 여지 없이 가을과 겨울에 걸쳐 샹장 강을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사이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력 5년(770)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두보는 그 고생스런 일생을 끝마쳤다.

이때 나이 59세였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에 두었는데, 그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뤄양 옌스 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서우양 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옆에 묻었다.

 

절구 (絶句) 杜甫

(지을 당시 제목이 없어 그냥 絶句로 불림.)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강벽조우백 산청화욕연

금춘간우과 하일시귀년

 

강물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게 보이고

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도다.

올봄이 보건대 또 지나가니

어느 날이 정말 고향에 돌아갈 해인고.

 

이백(李白)은 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려 오는듯 후련한데 반하여 두보(杜甫)는 어려서부터 성실. 노력형으로 인도주의와 사실주의를 철학으로 하여 세심하고 치밀하게 한 자. 한 단어를 독창과 신기(新奇)를 나타내려 하였다

 

讀書破萬券 ‘만권의 책을 독파 하자’

下筆如有神 ‘붓을 들고 글을 지으니 마치 신 들린 듯 하다’ 하였다.

 

여기서 波(파)는 꿰뚫었다.

즉 硏鑽苦心(연찬고심). 刻苦努力(각고노력)했음을 알리고자 하는 표현.오늘의 시(詩)도 그러한 문장으로 대귀(代句)의 솜씨를 잘 나타낸 걸작.

 

           春望     杜甫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  감시화천루 한별조경심

봉화연삼월 가서저만금  백두소경단 혹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지만 산천은 남아서  성에는 봄이 와 초목이 무성하네

때가 어지러워 꽃을 봐도 눈물이 나고 이별의 한에 새소리에도 가슴이 놀라네

봉화는 석달이나 계속 오르는데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보다 귀하구나

흰 머리는 빗을수록 짧아져 이제는 비녀를 꽂을데도 없어라.

 

두보의 나이 46세 때 안녹산의 난으로 함락된 장안(長安)에서 지은 작품이다.

오언 율시로 각 2행씩이 모여서 하나의 연을 이룬다.

두련(頭聯)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구절로, 나라가 망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는 풀과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세사(世事)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다.

꽃을 보아도 눈물이 나고 새가 울어도 헤어진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놀란다고 한 함련( 聯)은 상식을 뛰어넘는 표현으로, 난리통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두보의 간절한 심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경련(頸聯)에서는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을 노래하고,

 미련(尾聯)에서는 타향에서 덧없이 늙어 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이백이나 두보의 시가 우리나라 시에 미친 영향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唐詩(당시)는 기원전의 周(주)대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천6백 여년 동안 생산된 시가 보다 양적으로 두 세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唐代(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백의 자는 太白(태백)으로,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西川(서천)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니던 그는 40여세에 즈음하여 잠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다시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安綠山(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詩仙(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는 712년 河南(한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杜審言(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겼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동안 전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이 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가 「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대조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시인은 서로 끈끈한 교분을 지니면서 지냈다.

특히 두보의 시는 유교적인 우국과 사실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많아 조선조의 통치이념과 부합하였다.

조선의 국시와 일치하였기에 세종조의 두시주석과 성종조의 두시언해가 이루어지는데 이로 인해 조선인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望嶽[태산을 바라보고] 杜甫,

 

岱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鐘神秀 陰陽割昏曉

盪胸生曾雲 決眥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대종부여하 제노청미료   조화종신수 음양할혼효

탕흉생증운 결자입귀조    회당능절정 일람중산소

 

태산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제나라와 노나라까지 푸른 빛이 끝이 없네.

조물주께선 신비로운 것들만 모아 놓았으니   산의 앞뒤로 아침과 저녁이 나뉘었구나

가슴을 쏴악 씻어내니 층구름이 솟고,   눈을 브릅 뜨니 돌아가는 새도 들어보네.

반드시 산 정상에 한번 올라가서   주위의 작은 산들을 굽어보리라.

 

두보의 29세때 산동성에서 태산을 바라보고 지은 것이다

그가 40세전에 이미1000 여수를 지었으나 후세에 정리할때 초기에 것은 버렸기 때문에 몇 수만 남아있다

우뚝하고 수려한 산세를 생기있게 그리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만상이 그 산에서 일어나고 돌아옴을 감탄하고 이다음에 반드시 등정하여 공자가 느꼈든 바를 실감하련다 하고 표현하고 있다.

 

* 2006년4월21일 胡錦濤 중국주석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부시대통령과 회담도중 인용했던 詩句  이기도 합니다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회당릉절정 일람중산소

(정상에 올라가서 주위의 작은 산들 굽어본다)

 

이제우리 중국도 정상에 올라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선진국 감동을 느끼겠다라는 의지를 표현한 시로

중국의 문화자랑의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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