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風水등/漢詩·漢文

백운거사 李奎報와 국선생

아치울잡초 2012. 7. 7. 23:29

 

 

 

 

   백운거사 李奎報와 국선생  

늙고 병든 몸

차 품질을 따질 겨를이 있으랴.

같으나 일곱 잔 마시고 또 일곱 잔

저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

차를 보고 술을 찾음이 미치광이

스님에게 봄술 빚기를 권함이 무슨 잘못이랴.

만취한 뒤에야 비로소 차맛을 알기 때문일세.

 

이는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차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규보는 평생토록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한 풍류거사였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이규보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차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와 술 마시는 것을 자신의 풍류행이라고 읊기도 했다.

喫茶飮酒遺一生 來往風流從此始

차 마시고 술 마시며 일생을 보내면서

오거니 가거니 풍류놀이를 따라가 보세

 

또한 귀한 차, 좋은 차에 대해서도 이렇게 읊었다.  

秘之不敢示情親 寓心獨待識茶人

좋은 차는 정인에게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네.

오직 마음에 간직하여 차를 알아주는 이에게만 대접하지

 

불후의 걸작인 민족 대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는

‘고려의 이태백’으로 불릴 만큼 시재가 빼어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72세로 천수를 마칠 때까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백운소설집><동국이상국집> 등 7천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차에 관해 읊은 시가 40여 수나 된다.

 

백운 이규보는 ‘인중룡(人中龍)’이라고 불릴 만큼 어려서부터 빼어난 인재였다.

또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은 경지에 이른 학자였으며,

문신으로서는 몽골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충신이기도 했다.

백운 이규보는 고려 의종 22년(1168년) 음력 12월 16일에

당시 황려현으로 부르던 오늘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었으며,

아호는 백운거사ㆍ백운산인, 또는 지지헌(止止軒), 삼혹호선생 등이 있다.

지지헌이란 그가 뒷날 개경 동쪽에 초당을 짓고 살면서 붙인 당호인데,

<주역>의 ‘능히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규보는 천부적으로 총명하여

겨우 9세 때부터 글을 익혀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11세 때에는 이런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

종이 길에 모학사(붓)가 줄지어 가고  속에는 늘 국선생(술)이 있네

  

또 14세 때에는 과거 예비고사에서 시를 가장 먼저 지어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슨 글이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유ㆍ불ㆍ선 3교에 두루 통달했으며,

경사와 제자백가도 섭렵하여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하는 기재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시와 술과 차와 거문고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기에 너무나 바빴기에 정작 과거공부는 소홀히 했던

탓인지 천하의 이규보도 16, 18, 20세에 각각 과거를 보았지만 세 차례 모두 연거푸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명종 19년(1189년) 21세 때에야 비로소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했고,

그 이듬해에는 예부시에도 합격했다.

 

<고려사> ‘열전’ 이규보편에 따르면

그때 과거를 보기 전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자신이 28개 별자리 가운데 문운(文運)을 맡은 규성(奎星)이라고 했다.

 

과연 꿈에 나타난 규성의 말대로 장원급제를 했기에 크게 기뻐하며

인저란 이름을 규보라고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워낙 술 마시고 풍류를 즐기기에 바빴으므로

벼슬다운 벼슬은 못 해보고 계속 미관말직으로만 떠돌았다.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을 휘두르던 무신시대였으므로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장원급제를 했어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마음대로 큰 뜻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술과 차를 사랑했다.

10대 소년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술을 끊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주색으로 몸을 상하는 일도 없었다.

 

다음은 이규보가 젊은 시절 술을 예찬한 시이다.  

 

술은 시가 되어 하늘을 뛰어다니고

이곳에는 미인의 영혼인 꽃도 있구나.

오늘 밤 술과 꽃이 있으니

참으로 귀인과 더불어 하늘로 오르는 듯하네

  

이규보는 24세에 부친을 여의자 개성 천마산에 은거하며 백운거사라고 자호했다.

그가 불멸의 민족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은 것이

바로 천마산에 은거하던 26세 때였다.

 

그렇게 지내던 이규보가 비로소 벼슬다운 벼슬길에 오른 것은

당시로선 늙은이 축에 들어가던 48세 때였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인 의종 23년은 정중부(鄭仲夫)가

이른바 무신의 난을 일으킨 해였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신들의 천하가 되었으므로

이후 오랫동안 문신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죽어지내야만 했다.

이규보 또한 비상한 재주를 타고났으나

당대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에게 벼슬을 구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하여

어용문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부자를 죽이고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갑자기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여 철권을 휘두른 자가 이의민(李義旼).

최충헌이 이의민 일파를 몰살시키고 새로운 군사독재자가 된 것이

이규보가 28세 되던 해인 명종 26년(1196년)이었다.

최충헌과 최이(崔怡) 부자는 집권하자 정중부나 이의민 같은 선배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권안보를 위해 문신들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선비들을 많이 발탁했고, 이규보도 이에 따라 그들 부자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규보는 고종 6년(1219년) 51세 되던 해에 별것도 아닌 일로

좌천당해 지방으로 쫓겨 내려갔다.

그해는 최충헌이 죽은 해였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자가 된 그의 아들 최이는 좌천당했던 이규보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올려 태복소경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 뒤 이규보는 지제고를 거쳐 고종 17년(1230년)에 마침내 장관급인 호부상서에 올랐으니

그때 이미 나이 62세였다.

 

그 뒤 정당문학감수국사와 태자태보 같은 벼슬을 거쳐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 강화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이 시작되던 고종 23년 겨울에 노환을 사유로 은퇴를 요청했다가, 69세가 된

그 이듬해에야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벼슬을 내놓고도 빈번한 몽골군의 침범으로 강토를 유린당하는 나라를 위해

외교문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공을 기원하고 기고문(祈告文)을 짓기도 했다.

한 번은 이규보가 지은 외교문서의 문장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원나라 황제가 보고 탄복하여

몽골군을 스스로 철수시킨 적도 있었다.

 

백운 이규보는 그러면서도 노년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아호 삼혹호선생에 걸맞게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하고 차를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고종 28년(1241년) 9월 2일에 72세를 일기로 한 점 백운 같았던 풍류거사의 일생을 마쳤다.

 

백운 이규모의 묘소는 숱한 전란의 참화 속에서 잊혀졌다가1900년대 초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목비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간 백운곡에서 비석이 발견되고

후손에게 알려져 1967년에 묘역이 정화되고,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백운재가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는 후학들에 의해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과 풍류정신을 기리는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가 그의 묘소 앞쪽에 세워졌다.

 

차를 그지없이 사랑했던 백운 이규보의 차시 한 구절을 더 소개한다.

 

그리운 소식 몇 천리를 날아왔느뇨

흰 종이로 함을 싸고 붉은 실로 매었구나.

늘그막에 내 잠 많은 줄 알고

한식 전의 어린 찻잎 구해주었네.

벼슬 높다하되 가난하기 그지없기에

평시에 먹을 것도 없는데 하물며 차랴.

해마다 각별히 어진 사람이 주는 것 받으니

이제야 인간 재상집 대접을 받는가보다 

그리고 백운 이규보의 명시한편

詠井中月 李奎報

山僧貪月色 並汲一壺中

入寺無所見 方知色是空

달빛이 탐나서

산 속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항아리에 물과 함께

달을 가득 담았다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닫건대

항아리 물을 쏟고 나면

달빛도 사라지고 말겠네.

   

공간적 배경은 절간이 자리 잡은 깊은 산 속이다. 조용한 저녁 시간이다.

맑은 하늘에 달이 오르고 스님은 절간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

산사의 저녁은 조용하며 사람의 말소리나 짐승의 물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 멀리 높이 뜬 달만이 온 산천을 곱게 비추고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달빛이 쏟아지고 있다. 절간 모든 경내에도 그 달빛이 내리고 있다.

 

스님은 그 달빛에 취했다가 자기의 본연 임무를 깨닫는다.

우물의 물을 긷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곱게 뜬 달이 우물에도 떠 있지 않는가.

스님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을 쳐다본다.

아름다운 달이다. 곱기만 하다. 달빛이 손길에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고운 달이 우물에 담겨 있는 것이다. 잔잔한 우물에 청아한 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스님은 순간적으로 작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이 고운 달을 가져가고 싶었던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항아리에 물을 담으며 그 달을 함께 담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항아리에 물과 함께 달을 담아 가기로 작정하였다.

항아리에 물도 달도 넉넉히 담았다. 마음이 아주 편하다. 기쁘기만 하다.

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떠있다. 스님의 물 항아리에도 달이 담겼다.

 

스님은 이 순간 불교에서 추구하는 무소유의 원칙을 어기고 작은 탐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달도 탐내어서 안 된다는 깨달음을 잠시 잊어버린 것 같다.

스님은 절간에 돌아 와서 큰 항아리에 가져온 물을 부었다.

아마 물을 보관해 두는 큰 항아리는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스님이 항아리에 물을 붓자, 달빛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애써 항아리에 담아 온 달이 그만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실망하지 않는다. 하늘의 달은 언제나 변함없이 떠 있다.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고 있다.

혼자 빙긋이 웃고 만다.

 

이 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 발상이 담겨 있다.

하늘의 달을 절간으로 가져오고 싶은 동심을 표현한 것이다.

천재 시인 이규보의 시적 감각이 담겨 옛 사람들은 이처럼 순진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다.

자연은 언제나 무언의 위안과 평화를 주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시인 이규보의 발상은 참으로 멋스럽다.

 

하늘에 뜬 달이 우물에 비치고 그 달을 다시 절간으로 퍼 오겠다는 발상은

조선 중종 때의 기녀 황진이가 동짓달 긴 밤을 베어다가

춘풍 이불 속에 고이고이 접어 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신 밤에 고이고이 펴서

임과 함께 오래 오래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발상과 비슷하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겠다는 발상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한의학에서 바라본 바람직한 음주습관

옛부터 술은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하였습니다.

심지어 이규보의 <국선생전>같은 작품을 보면 술(누룩)을 의인화하여

군신과의 관계를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역사의 중심에 술이 있어서 '주지육림(酒池肉林)'과 같은 고사성어로 남아

술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한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촉매제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아무튼 적당한 음주와 음주습관은 건강에 좋으나

논어에서 언급하였듯이 '과유불급'.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입니다.

아래에서 한의학에서 보는 술과 동의보감에서 제시하는 음주습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술의 개념 동의보감 內傷(내상)편을 보면 "술은 5곡의 진액이다.

쌀누룩의 정화인데 비록 사람을 이롭게도 하지만 상하게도 한다.

왜냐하면 술은 뜨겁고 몹시 독하기 때문이다.

찬바람과 추위를 물리치고 혈맥을 잘 돌게 하며

사기를 없애고 약기운을 잘 돌게 하는데에는 술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만일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정신이 착란되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생명을 잃게 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의학적으로 볼때 바람직한 음주습관은

탁주를 마신 다음 국수를 먹어 땀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한다

술은 3잔이상 마시지 말아야 한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말아야 한다.

술이 지나쳤으면 빨리 토하게 하는 것이 좋다.

술에 취한 뒤에 억지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혹 옹저(큰 종기)가 생길수 있다.

술에 취한 다음 성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배부르게 먹은 뒤에는 음주를 더욱 삼가해야 한다.

술을 마시되 너무 빨리 마시지 말아야 한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보면 현대인의 입장에서 너무 엄격한 규율을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두가지씩 실천에 옮긴다면 분명 술의 폐해로부터 건강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출처] 한의학에서 바라본 바람직한 음주습관|작성자 KIOM

 

국선생전」 이규보

 

국성(麴聖)의 자는 중지(中之)니 바로 주천(酒泉) 사람이다.

국성은 맑은 술을 뜻하는데 어릴 때에는 서막(徐邈)*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이름과 자(字)는 모두 서씨가 지어 주었다.

그의 조상은 애초에 온(溫)이라고 하는 고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칠 때에 포로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그 자손의 일파가 정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증조는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고, 조부 모(牟)가 주천이란 곳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차(醝)에 이르러서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평원 독우(平原督郵)의 직을 역임하였고,

사농경(司農卿) 곡씨(穀氏)의 따님과 결혼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은 어렸을 때부터 도량이 넓고 침착하여, 아버지의 친지들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도량이 만 이랑의 물과 같아서, 가라앉히더라도 더 맑아지지 않으며,

흔들어 보더라도 탁(濁)해지지 않으니,

우리는 자네와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아이와 함께 기뻐함이 좋네.”

 

성이 자라서, 중산(中山)에 사는 유영(劉怜), 심양(瀋陽)에 사는 도잠(陶潛)과 벗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 말하기를,

“하루라도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면 심중에 물루(物累)*가 생긴다.” 라고 하며,

만날 때마다 저물도록 같이 놀고, 서로 헤어질 때는 항상 섭섭해 하였다.

나라에서 성에게 조구연(糟丘椽)*을 시켰지만 부임하지 않자,

또 청주 종사(靑州從事)로 불렀다. 공경(公卿)들이 계속하여 그를 조정에 천거하니

임금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고 공거(公車)를 보내어 불러 보고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주천의 국생인가? 내가 그의 명성을 들어온 지 오래다.” 라고 하셨다.

이보다 앞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을 낸다 하더니,

얼마 안되어 성(聖)이 이른지라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곧 주객 낭중(主客郎中) 벼슬을 시키고,

이윽고 국자제주(國子祭酒)로 올리어 예의사(禮儀使)를 겸하니,

무릇 조회(朝會)의 잔치와 종조(宗祖)의 제사ㆍ천식(薦食)ㆍ진작(進酌)의 예(禮)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는지라,

위에서 기국이 듬직하다 하여 올려서 후설(喉舌)*의 직에 두고,

우례(優禮)로 대접하여 매양 들어와 뵐 적에 교자(轎子)를 탄 채로 대궐에 오르라 명하여,

국선생(麴先生)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임금의 마음이 불쾌함이 있어도 성(聖)이 들어와 뵈면

임금은 비로소 크게 웃으니, 무릇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원래 성은 성질이 구수하고 아량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 친근해졌고, 특히 임금과는 조금도 스스럼없이 가까워졌다.

자연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어 항상 따라 다니면서 잔치 자리에서 함께 놀았다.

성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혹(酷)과 폭(䤖)과 역(醳)이다.

혹은 독한 술, 폭은 진한 술, 역은 쓴 술이다.

이들은 그 아비가 임금의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방자하게 굴었다.

중서령(中書令) 모영(毛潁)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탄핵했다.

모영은 곧 붓이다. 그 글은 이러했다.

“행신(幸臣)이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천하 사람들은 모두 병통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국성이 조그만 신임을 받고 조정에 쓰이고 있어

요행히 벼슬 계급이 3품에 올라서, 많은 도둑을 궁중으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을 휘감아서 해치기를 일삼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분하게 여겨, 소리치고 반대하며 머리를 앓고 가슴 아파합니다.

이 자야말로 국가의 병통을 바로잡는 충신이 아니옵고, 실상 만백성에게 해독을 주는 도둑이옵니다.

더구나 성의 자식 셋은 제 아비가 폐하께 총애 받는 것을 믿고,

제 마음대로 세상에 횡행하고 방자하게 굴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데 이들에게 모두 사형을 내리셔서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옵소서.”

 

[중간 줄거리] 아비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은

그의 세 아들은 자살하고 국성도 연좌(連坐)되어 서인(庶人)이 되기까지 한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성은 국란(國亂)이 일어나자 출정(出征)하여

도둑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이 일로 또다시 높은 벼슬을 받으나,

상소하고 물러나와 제 본분을 지키며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국씨는 원래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이었는데,

성이 유독 넉넉한 덕이 있고, 맑은 재주가 있어서

당시 임금의 심복이 되어 국가의 정사에까지 참예하고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어 태평스러운 시절의 공을 이루었으니 장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이 극도에 달하자

마침내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화(禍)가 그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실상 그에게는 유감이 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는 만절(晩節)이 넉넉한 것을 알고 자기 스스로 물러나서

마침내 천수(天壽)로 세상을 마쳤다.

주역(周易)에 기미를 보아서 일을 해 나간다[見機而作]고 한 말이 있는데,

성이야말로 거의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 이규보, 「국선생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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