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作談論/하루 또하루

무교회주의에 대한 의견들

아치울잡초 2014. 9. 16. 11:56

 

 

 

 

'무교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을 모아 본다.

알고싶은 것은 많고~ 눈은 침침해지고~ 야단났다.

 

첫번째 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대하여

우치무라 간조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파견하신 세계적인 예언자요 종교개혁자요 성경학자였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모든 글을 사심과 편견 없이 읽고나면 나의 이 단정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냥 들은 풍월로 우치무라 간조와, 그가 제창한 무교회주의를 그 명칭만 가지고 비판하거나 배척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우리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는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명칭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그 내용(contents)을 스스로 지레짐작해서 경계심부터 갖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그 이름으로 포장된 알맹이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이름에 지나치게 경계심을 갖지 말고 우선 우치무라가 그 명칭으로써 무엇을 가장 소리높이 외치고 싶어 했는가, 와 또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가 어떠한가를 진지하게 고찰해 보아야 한다. 무교회주의는 기독교의 하나의 종파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둔 정신상의 흐름이다. 무교회주의를 그 이름만 언뜻 보고서, 교회를 없애고 모이기를 폐지하고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를 배격하는 위험스런 기독교의 한 집단쯤으로 대충 지레 짐작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없애자는 주장이 절대로 아니다. 무교회주의는 무 교회주의. 즉 교회주의를 없애자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 의식으로서의 교회, 겉껍데기만 붙잡고 있는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의 대업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자는 주의다. 오늘날 교회주의 에서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과감하게 시정하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로 돌아가, 참된 성경 진리에 입각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철저히 구명하여,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자, 고 하는 인류 정신사()의 한 값진 유산이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부터 약 400년 후에 우치무라 간조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루터와 칼뱅이 못다 이룬 종교개혁의 계승이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흐름을 더듬어보면 예레미야---예수---바울---루터---우치무라, 이렇게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인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가 청렬한 지하수의 수맥처럼 흘러내려서, 시대를 뛰어넘어 여러 나라에서 치솟아 오른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개혁이 형식화해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민족을 선택하셔서 영원한 진리의 샘을 또다시 새롭게 터뜨려 치솟게 하시는 것이다.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에게서 개혁 정신을 배워야 한다면, 근세의 개혁자로 하나님께서 동양에 보내신 우치무라에게서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essence)를 배워야 할 의무와 특권이 우리에게는 있다. 우치무라의 종교개혁의 특색은 역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한 로마서 328절의 원리를 강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통해 이 사죄의 복음을 깨달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성서를 연구했다. 그러기에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로마서였다.

 

우치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이며 영적인 교회(the invisible, universal and spiritual church)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리고 늘 그것을 소망하고 동경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신령한 교회의 지체들이 곧 우리 크리스천이라고 그는 힘주어 가르쳤다. 그러나 이 지상의 제도와 전통과 교리와 의식과 건물을 마치 그 본질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교회주의자 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노우를 외쳤다. 스데반도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

 

예언자(이사야)가 말한 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지을 것이며,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고 하였다 (7: 48-49). 눈에 보이는 성전이 세워지고난 후 사람들은 마치 특수한 건물이 하나님이 사시는 곳으로 잘못 알아 거기만 신성한 곳으로 착각했다.

 

이 잘못을 깨우치고, 사람이 만든 건물 곧 성전이나 교회당, 그리고 사람이 만든 제도나 의식이나 신조나 관례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자는 것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흐름을 이어받은 스데반의 정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신약에 있어서의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다. 지면에 제약이 있어 다 쓰지 못하지만 이런 안목으로 읽어보면 바울 서신이나 요한 문서, 그리고 특히 히브리서 등은 명백히 무교회주의 정신을 역설하고 있는데,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모를 뿐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교회나 교파나 학파 등의 고정관념에 전혀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순수한 복음 진리만을 캐내어 후세에 전하였다. 위에서 나는 그의 열매를 보아서 그의 신앙을 안다고 하였다. 그의 일생은 그의 전기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제자를 보면 그의 스승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우치무라 문하의 제자들의 면모를 극히 일부만 소개하는데 그치겠다.

 

우선 우리나라의 목사님들이나 성경 연구가들이 애독하는 구로사키 고기치 (黑崎幸吉)의 주해 신약성서 의 저자를 꼽을 수 있다. 또 전쟁 후 도쿄대학 총장을 두 번이나 지낸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도 우치무라의 제자이다. 그리고 쓰카모토 도라지 (塚本虎二)는 자그마치 8권이나 되는 예수 전 연구 를 써낸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성경학자이다. 그는 도쿄대학 법학과를 나온 수재이었는데도 스승 우치무라를 만나고 나서 세상 직장을 다 포기하고, , , , , 라틴어 등 성서 어학을 통효해서 오직 성경 연구와 전도에만 90 평생을 바쳤다.

 

작년 (2000) 에 별세한 세키네 마사오(關根正雄)는 세계적인 구약학자로서, 구약 전서를 혼자서 구어 현대어체로 번역했고, 역시 전도와 교육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 밖에도 여기에 다 쓸 수는 도저히 없을 정도로 많은 제제다사가 우치무라의 문하와 무교회 진영에서 배출되었다. 이런 분들의 저서나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성경의 근본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굳게 파악하고 그 정신과 신앙을 올바로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다만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이런 소중한 열매를 맺은 거목(巨木) 우치무라 간조와 그의 무교회주의 십자가 정신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기에 그토록 알찬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을 아낀다면 그것은 큰 손실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 중 두드러진 세 분을 들 수 있는데, 독자들의 오해를 풀게 하기 위해 이를 덧붙인다. 김교신과 송두용과 함석헌의 세 분이다. 이 세 사람은 일본 도쿄에 유학 가서 친히 우치무라 문하에서 성경과 신앙을 배우고 귀국해서 성서조선 이라는 월간 신앙 성서잡지까지 함께 발간하면서 전도했다. , 송 두 사람은 끝까지 무교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신앙을 잘 지켜냈다. 문제는 함석헌이다.

 

그도 20대인 청년시절에는 십자가 복음 신앙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잘 지키며 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30대 중반부터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에 이르는 종교라고 하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주의 운동과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이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그는 노자, 불경, 장자 등을 탐닉했고 마지막에는 퀘이커에 기울었다. 함석헌은 역사 철학가로서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 국민 계몽에 나름대로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나, 성경이 말하는 크리스천 상()에서는 크게 일탈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요 우치무라와는 완전히 결별한 사람이요 예수님의 신도가 아니다. 그는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보지 않고 탈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행적을 보고서 그것을 무교회주의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우치무라는 십자가 대속 신앙에서 한 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 입장에서 전도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거기에 이의를 다는 제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결별을 선언했다. 그런데 함석헌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내 자신이 자주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한, 어떻게 역사화 된 예수를 내 믿음의 목적으로 삼고 그저 <주님, 주님> 하고만 부르겠습니까? 어떻게 자주적 인격을 가진 도덕적 인간의 속죄가 이런식 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이상 김성수 지음 함석헌 평전 72면에서 재인용). 함석헌은 이로 보건대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미 멀어진 사람이며 하물며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극과 극을 달린 사람이다.

 

그는 무교회주의도, 우치무라의 제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저널리즘은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를 무교회주의자의 범주에 넣어서 소개하고 있다. 두 쪽 모두를 자세히 모르는 독자는 이런 무책임한 소개의 글만 보고 두 쪽 모두를 오해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유곤님 글-

 

 

두번째 글,  류석동과 그리스도의 옷신비주의

 

송두용과 마찬가지로 류석동은 조선 무교회주의의 운동을 적극저으로 보급하던 무교회주의자이다.

 

(성서주선)에 발표된 20편 가까운 그의 글 들은 조선 무교회주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 매우 우호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자신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을 비록한 기타 여러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같이 무교회주의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송두용식의 급진적인 무교회주의를 지양하고, 매우 온건한 신앙 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몇군데의 무교회주의적 표현을 제외하면 그를 교 회주의자라고 불러도 별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이었 고, 성서적이었다.

그것은 그만이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영 생의 체험을 한 것이다.

그는 확실히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교회나, 성서나, 성례 등을 함부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할 수 없는, 두려움과 경외적인 떨림 (nouminose)을 늘 갖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신앙체험을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다.

520일은 나에게 특별한 생각과 느낌을 준다.

이 날은 내가 육에서 죽고 영에 들어온 날이다. 과거 몇십년 동안의 자아의 생활에서 버서나 하나님의 생활로 들어오게 된 날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뿐만 아니라 그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게 된 날이다. 물론 나는 이 날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또 벗들 앞에서 이상한 힘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홀로 방에 앉아 자기의 죄악에 이때까지 없는 고민을 깨달아 어찔할 줄을 몰라 보통 때와 같이 기도를 하다가 성서를 읽고 성서를 읽다가는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과연 꿈에도 생각지 아니한 일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고린도전서 제 130절 후반의 한말 '예수는 하나님께서 세우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속죄함이 되셨으니...'가 번개같이 마음속에 지나가며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뚜렷이 보였다....

 

나의 가슴은 터지는듯하고 눈에서는 눈물이 쏘다지며 말할 수없는 기쁨이 한없이 생겼다. 이 기쁨이 생긴 다음 순간에는 이 몸, 이 마음을 에수 그리스도에게 바치자는 각오가 무럭무럭 일어나며 나를 당신 마음대로 써줍소서 하는 기도가 솟아 나왔다.

이때 나의 분열된 의지, 이지,감정은 통일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이 한 뭉치가 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류석동은 전투적 언어로 교회주의를 공격하는 김교신, 함석헌,송두용 등 과 너무 대조적인 무교회주의자이다.

그는 김교신처럼 유일의 선생을 가진 자가 아니므로 선생으로부터 배움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살았고 지금 또한 살고있다."

 

"나는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비로소 자유스럽게 되고 충족함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성 서를 읽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외쳤다. "성서만이 생명의 양식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 "성서를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라. 천상천하에 이 책 밖에 생명을 전하여 주는 것이 없느니 라.".

 

그의 중심 개념은 "무교회"가 아니고 "신앙"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편리하게 신앙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앙주의의 출발점은 신앙의 유형이나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고, 삶에서 역동하는 신앙 자체라고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를 원했다. 이러한 소원이 그를 더욱 신앙주의로 이끌어 갔으며, 그가 신앙주의에 더욱 깊이 몰입하면 할수록 그는 공리주의에 빠져든 신앙 절대주의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 그의 의와 성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가겠나이다. 이제 우리의 소원은 달하였나이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옷" 사상은 신앙의 극치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천상천하에 이 옷밖에 우리가 입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옷이 없나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본 류석동의 "그리스도의 옷" 이란 곧 그리스도와 합일의 경지에서 가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이신득구의 신앙사상이 그 이면에 깊이 깔려 있다. 그것은 신앙이며, 영생에의 길이었다.

 

그는 다음의 말을 통해서 신앙을 규정하고 있다.

신앙이란 비애의 골짝에서 모순의 그물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의 음악이다.

투쟁 속에서 나오는 평화의 노래이다.

불완전한 우주에서 들여오는 해조의 음률이고 불비한 인간의 말 속에서 생겨나는 성서의 통일이고 약한 인간의 육 속에서 일어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완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류석동의 신앙은 무엇에 대한 신앙인가를 그의 진술을 통해서 직접 찾아 보자,

그는 "십자가는 나의 신앙의 처음이고 끝이다"고 분명히 진술했다.

그의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인 십자가는 자기 실존의 전부였다.

그의 십자가 신앙은 "그리스도의 옷"사상이나 성서주의와 더불어 그의 신앙주의를 새롭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는 인간의 실존이 십자가의 2중성, 즉 알파포인트(alpha-piont)와 오메가 포인트(omega-point) 사이에서 존재하는 양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의 알파점은 인간의 실존의 원초성이며, 십자가의 오메가점은 인간의 실존의 초극성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류석동에게서 신앙의 처 음과 끝인 십자가는 신앙하는 인간 실조의 전체성이며, 통일, 실존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류석동은 교회무용론은 역설하는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신앙의 형식화나 공리주의적 신앙절대주의를 부정하고, 철저히 성서주의적이며, 그리스도와 합일의 체험에서 표출된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한 양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신앙의 전체였으며, 그리스도와의 접합,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경지를 항상 최상의 희열로 흠모했다.

그는 기성 교회나 제도를 적대하며 비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의 예민한 문제들을 일정한 표준없이 난도질하거나 비판하는 만용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교회주의라기 보다는 십자가 신앙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마땅할 것 같다.

 

그가 조선 무교회주의 동지들과의 사상교류나 [성서조선]지에 논단 발표를 19343월 이후로 거의 단절해 버렸던 점은 그의 기독교 이해와 신앙이 이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한 때 단테에 심취했었고, "한 때는 밀턴에 마음을 빼앗긴 때가 있었고 또 한 때는 사옹(세익스피어를 한자음 표기로 줄여서 일컫는 말)에 몰두할 때가 있었고 또 한 때는 희랍철학에도 경도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오메가 포인트는 성서였다. 그는 성서를 "생명의 양식"이며, "영원한 생명을 길러주는 살과 피"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과 철학에서 성서로 전향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앙은 성서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붙여질 성서주의란 미국의 보수 주의적 근본주의의 성서주의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세번때 글,  “무교회주의가 뭐예요?” "이단 아니죠?"

 

작년인가 보다. 나더러 무교회주의가 뭐예요?”라는 쪽지를 누군가로부터 받았다. 또 다른 쪽지는 무교회주의가 이단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쪽지의 답에 대신할 겸, 우선 무교회주의가 무엇인지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무교회주의는 1892년 우찌무라 간조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교회이고 1901무교회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본격적인 무교회운동을 시작하였다. 우찌무라 간조가 무교회를 주창하게 된 계기는 대체로 두 가지의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일본 내 선교사들의 과도한 선교 경쟁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미국유학시절 물질문명에 빠져있는 기독교에 대한 커다란 실망과 충격 때문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경험한 기독교 모두에 실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 내의 모든 제도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도와 생명(하나님)은 양립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제도도 필요하고 생명도 필요하다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찌무라 간조는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는 참다운 교회는 꿈꾸었고 그것이 바로 무교회 또는 무교회주의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말을 들어보자. “교회의 제도가 아무리 귀하고 우세하더라도 한 사람의 참 신자에게는 제도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하고 생동하는 자발적인 면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속에 갇힌 신앙을 거부하고, 제도 너머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참 신앙을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재차 삼차 강조하지만, 그는 일부에서의 편견과는 달리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추구하였다. 특히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성경에 근거하여 말하였다.

그가 말하길 오늘날과 같은 교회는 사도 바울에서부터 탄생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바울에게 에클레시아, 말 그대로 부르심을 받아 형성한 단체이다.

 

바울은 스스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된 자이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에 그들이 모여서 이룩된 것이 바로 에클레시아곧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교회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서로, 그리고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라고 우찌무라 간조는 강조한다.

 

따라서 서초역 근처에 몇 천억을 들여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 것이 오로지 교회가 아니며, 그러한 콘크리트 건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제도는 더더욱 진정하고 참된 교회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오히려 건물과 제도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더 존귀하다는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서는 일단 이 정도로 해두자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무교회주의자는 누군지 알아보자.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교회주의자는 김교신 선생이다. 무교회주의가 대략 어떠한 것인지 우찌무라 간조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때문에 김교신(우찌무라 간조의 수제자) 선생의 무교회주의를 따로 설명하기보다 그의 성서조선 창간사를 살펴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도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는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라.” 고 적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고 단호하다. 우찌무라 간조와 마찬가지로 김교신 역시 기성교회 대해 상당한 실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느낀 것이다.

따라서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 창간사를 통해 그 발의 먼지를 털라라는 대목에서 무교회주의를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길 군대 생활을 모질게 했다면 그 군대가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교신 선생이야 말로 기성 교회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말라는 뜻이라 여겨진다.

김교신 선생과 함께 무교회주의에 동참한 사람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도 있다. (나중에 퀘이커 교도가 되기도 함)

또 이들과는 조금 다른 신앙이지만 다석 류영모 선생도 무교회주의자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기독교주의자이나 유불선을 통섭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김교신, 함석헌 선생은 모두 1901년 생으로 동갑인데 둘 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다석 선생은 나중에 따로 언급하는 게 좋겠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신앙 행태는 재차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변질되고, 게다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

문제는,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교회세습, 공금횡령과 배임, 권력과의 야합, 극우적 반공 기독교, 맘몬과 바알 숭배, 기복신앙과 친일문제 심지어 목회자의 여자 문제도 제법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건대 무교회주의는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우찌무라 간조와 김교신 선생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이고 그야말로 독실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으로는 이점이 다소 아쉽다. 해서 류영모 선생도 김교신과의 이러한 신앙 차이 때문에 성서조선에 정식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얘기해야 할 게 있다. 무교회주의가 이단이냐 정통이냐의 문제이다. 역사적인 예를 하나 가지 들어 보자.

유학에서는 노장 사상과 묵자 그리고 불교와 양명학은 이단이다. 그런데 양명학에서는 주자의 격물’(대학) 해석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왕양명의 주자 비판은 격물 뿐 만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유학은 조선의 보수 성리학자들처럼 다른 학문을 이단이라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지는 않는다. 하여 노론 계통의 성리학자들이 얼마나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알게 할 뿐이다.

결국 정통과 이단은 상대적이라는 것이고 다원주의란 것도 통섭의 차원에서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원주의가 존재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어쩌면 오늘날에 필요한 가치일 수 있다.

불행한 것은 중국 송나라와 고려의 불교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에서도 다른 사상과 학문은 이단으로 내 몰았다.

조선의 성리학이 썩어 빠졌을 때도 불교와 노장사상, 양명학, 천주학 등 다른 사상과 가치 역시 이단으로 내몰았다.

특히 천주학 그러니까 기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려야했다. 아니러니 하게도 그 피를 통해서 성장한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대들은 절두산의 24인의 피흘림을 아는가? 또 일제 강점기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사실을 기억하는가. 그 영혼들이 오늘날 대형 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를 보고 얼마나 슬퍼할지 뒤돌아 보아야한다.

 

매주 일요일이면 대한민국 인구 중 약 천만 명이 전국 각지에서, 대체로 11시에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기쁘게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나는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서의 교회엔 가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자와는 어떤 장소, 어느 때, 어느 시에라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읽고 찬송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교회주의다. .

 

이글은 오늘날 내 조국 대한민국의 개신교의 변화를 바라며 무교주회주의에서 배울 점은 없는지를 상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 취지에 동의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란다.

 

 

 

   - 용잠초등학교 블러그 김기환님의 글 -

 

 

 

 

 

 

 

 

 

 

 

 

 

 

 

네번째 글,  "교회와 목사제도가 필요합니다"

 

 

 

1.넓은 의미에서 "무교회주의""교회주의"(조직화된 제도로서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견해)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신앙이나 신학사상을 말합니다.

 

 

 

한국에서의 무교회주의 운동은 무교회주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생으로 있던 한국 유학생들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교신은 1921년에 우치무라 간조의 로마서 강의를 청강했으며, 귀국할 때(273)까지 약 7년간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해서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이 19277월에 동인지 형태의 월간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가 한국에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일으킨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2. 김교신은 "무교회주의가 진정한 기독교이며, 무교회주의자가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제도화된 교회의 유무(有無), 세례의 유무는 참 신자가 되는 데 아무 관계가 없으며, 무교회주의가 복음이고, 무교회주의자가 곧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참 기독교는 교회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으며, 구원을 받는 것도 교리가 없어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무교회주의 신앙형태는 그의 동료인 함석헌에 와서 사상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교회가 바리새인화 되는 것, 즉 조직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대안(代案)으로 보았습니다.

 

 

 

3. 그러나 아직까지도 무교회 주의는 교회 밖에서 외치는 '재야의 소리'로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는 임세영 교수, 최정일, 한병덕 교사, 박상익 교수 등과 같은 제 3세대 인물들이 성서연구를 통해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김교신과 같이 소규모 성서연구 모임을 가지면서, 제도로부터 한 걸음 비켜선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조선>의 뒤를 잇는 <성서신애>, <성경연구> 등을 발행하여 회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는 여러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지만, 제도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교회주의 교세는 오류동 모임의 이진구 선생이 발행하는 <성서신애>가 약 2백 부 정도, 그리고 종로 YMCA 모임에서 발행하는 <성경연구>가 약 4백부 전도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그 세력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무교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름과 겨울에 한 차례씩 연합성서집회를 열고 있으며, 이 집회에는 약 7-80명 전도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상익 교수의 칼럼(http://column.daum.net/clio53)에 약 3백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4.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제도화된 교회 조직이나 목회자에 의존하지 않고 개별적인 노력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 특별한 영성과 성경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교회나 목회자 없이 홀로 성경을 배우고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어, 독일어, 희랍어 공부를 하도록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성경을 연구하려면 권위 있는 성서 주석을 직접 읽어야 하며, 성경 원문을 직접 해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성경 공부를 위해서 독일의 루터의 성서주해나, 기독교 고전 등을 직접 참고하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교회 신앙의 뿌리를 종교개혁자인 루터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루터가 교회의 권위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성경해석을 하여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이 바로 목사라는 직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복음에 접근해 나가는 방법이며,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직과 성경지상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공부 방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 치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성경 공부 방법은 가능하기만 하면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어, 독어로 된 기독교 고전을 참고하고, 헬라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직접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헬라어-히브리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무교회운동이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교수나 교사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5. 무교회주의자들의 구원관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교회 밖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제도화된 교회에 출석하거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제도나 형식을 거부하지만 복음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형식이나 목사에 의존하지 않고,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신앙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목사가 필요하지만, 독립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교회 제도나 목사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찌무라 간조나 김교신을 의지해서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인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바로 우상 없이 홀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숙한 성도들의 경우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제자들을 자기 곁에 두고 훈련을 시키셨지만, 그들을 훈련하신 후에는 세상에 선교사로 파송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전도해서 그 곳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남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교회 제도나 목사의 도움 없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새로 믿은 성도들이 교회와 목회자 없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일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저절로 성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들이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려고 교회에 목사와 교사들을 주셨습니다(4:11-12).

 

 

 

또한 성령께서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습니다(고전 12,14). 그리고 성찬과 세례는 사람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며, 사도들에게 세례와 성찬을 하라고 지시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28:19, 22:19).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6. 결론

 

우리는 위에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주장하는 신앙 생활 방법이나 구원관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러한 주장은 교회가 극도로 타락해서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에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제도적으로 타락해서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면 루터처럼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특별히 교회 제도와 목회자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무교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극도의 지적인 능력과 뼈를 깍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해 보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 중에 원어로 기독교 고전을 읽고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이러한 사람들은 기독교인 중에 1%도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무교회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이며, 크게 확장되기 어려운 특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는 나머지 99%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교회와 목사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사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제도와 목사제도는 전도와 양육, 선교와 예배, 봉사와 구제를 위한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에 왜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 글(http://biblenara.org/q&a/Q113.htm)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샘치유선교회 카페에서 옮겨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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