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楊貴妃)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양귀비는 당(唐)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총애를 받았던 비로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 도호(道號)가
태진(太眞)이다.
포주(蒲州) 영락(永樂: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랐다
가무(歌舞)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도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
양귀비는 중국의 대시인 이백(李白)과 백거이(白居易) 등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정도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민간 희곡 속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녀의 명성은 가히 세계적이어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壽王)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華山)으로 가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지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목욕하러 가는 양귀비>
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太眞宮)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천보(天寶) 4년(745)에 '귀비(貴妃)'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다.
양귀비는 섹스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으로부터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여, 수왕(壽王)에게서 기초를 닦고,
현종을 만남으로써 기교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구름같은 머리, 꽃다운 얼굴, 황금 비녀,
연꽃 휘장속에서 지새운 따사로운 봄밤.
봄밤이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이때부터 황제는 조회에도 안 나오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
현종은 양귀비의 처소로 가서 낮게 드리운 비단 휘장 안에서
양귀비와 밤새워 사랑을 나누고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극도에 달했던 것이다.
후궁에 미인들은 3천이나 되었지만,3천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네.
황금 궁전에서 화장 마치고 기다리는 밤, 백옥 누각에서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언니들과 오빠들도 모두 제후의 서열, 집안에도 찬란하게 서광이 비치구나.
마침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소망했다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양귀비가 '귀비(貴妃)'에 책봉된 이후로 그녀의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공(大尉齊國公)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光祿卿)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큰오빠는 홍로경(鴻로卿), 작은오빠는 시어사(侍御史), 남동생은 사공(司公)에 임명되었으며,
큰언니 옥패(玉佩)는 한국부인(韓國夫人), 셋째언니 옥쟁(玉箏)은 괵국부인(虢國夫人),
여덟째언니 옥차(玉釵)는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
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한번은 괵국부인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와 부마의 행열과 마주쳤는데,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평소 공주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빼앗고 부마의 관직마저 박탈하였다.
궁궐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주나 부마보다도 위에 있었던 것이다.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어느날 현종은 괵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그래서 현종이 또다시 양귀비에게 괵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그녀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楊氏)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永樂)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그 뒤 다시 선우중통(鮮于仲通)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괵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다.
따라서 괵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다.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華淸池)로 보냈다.
화청지의 물속에서 반쯤 드러난 양귀비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67세의 현종은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26세의 양귀비를 품에 안음으로 그간의 번뇌를 단번에 씻을 수 있었다.
양귀비의 입욕 조각상을 보면 바로 이때의 양귀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姚崇)과 송폭(宋爆)의 보좌로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하고 불렀다.
40대 후반의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그들은 아마도 변태적인 사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은 안록산이 양귀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힘껏 비비자
뜻밖에 그녀의 젖가슴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결국 현종에게 들통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중국어로는 "허즈(诃子)" 또는 "뚜떠우(肚兜)"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다.
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어양(魚陽)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깨뜨려 버렸다.
구중궁궐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수천만의 수레는 서남으로 피난갔다.
(백거이의 <장한가 > 중에서)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리 남짓,
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꽃 비녀 떨어져도 집는 사람 하나 없고,
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
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주지 못하고,
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양귀비의 묘> - 섬서성 흥평현 마외파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 모른다.
저녁이면 날아드는 반딧불에 그리움은 더해지고,
외로운 등잔불을 돋우느라 잠 못이루네.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반짝이는 은하수에 동이 트려 하는구나.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차가운 비취 이불 뉘와 함께 같이할까?
아득히 사별하여 해가 다시 지나가도,
영혼은 꿈속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그리고는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라."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한가(長恨歌 기나긴 한의 노래) - 백거이(白居易)
이백, 두보, 한유, 백거이 이렇게 4명의 당나라 시인을 묶어서 이두한백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백거이가 쓴 장한가는 온라인시대 도메인처럼
사랑노래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는 색을 중시하여 경국지색을 생각하고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황제에 오른 후 많은 해 동안 구했으나 얻지 못하였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의 한 아씨가 갓 장성하였는데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깊은 규방에서 자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天成麗質難自棄(천성려질난자기)
타고난 미모는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어느 날 갑자기 선택되어 군왕을 모시게 되었다
廻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동자를 돌려 한번 웃으면 백가지 아첨이 생겨나니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육궁의 단장한 미인들이 무색해졌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천자는 그녀에게 화청 연못에 들기를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활세응지)
온천의 부드러운 물은 윤기 있는 그녀의 몸을 씻었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이 부축하는 그녀의 몸은 힘없이 늘어졌고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이것이 천자의 승은을 받게 된 처음이었다.
雲빈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같은 머리칼, 꽃같은 얼굴, 걸으며 흔들거리는 금비녀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부용꽃 수놓은 휘장 안은 따뜻하고 봄날은 깊어만 갔다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봄밤은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 일어났고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불조조)
이 때 부터 천자는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承歡侍宴無閒暇(승환시연무한가)
그녀는 천자 기분에 맞춰 시중들기에 여념이 없어
春從春遊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봄놀이 밤이면 밤새껏 그녀 혼자 천자를 독차지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는 궁녀 3천명이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그 3천명이 받을 총애가 그녀에게만 있었다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금옥에서 화장한 뒤 황제의 밤을 모셨고
玉樓宴罷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난 뒤 취한 마음은 봄날의 화창함에 녹았다
姉妹弟兄皆列土(자매형제개열토)
그녀의 자매 형제는 봉토를 받았고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그들의 집 문에는 눈부신 광채가 났다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 마음은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아들 낳기보다 딸 낳기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宮高妻入靑雲(이궁고처입청운)
이궁은 높이 솟아 푸른 구름에 닿았고
仙樂風飄處處聞(선락풍표처처문)
신선의 음악은 바람처럼 여기저기서 들린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느릿한 노래에 맞게 고요한 춤이 추어지고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하루가 다가도록 군왕은 부족함을 몰랐다
漁陽비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전쟁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들려 오고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연주되던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피어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일천수레와 일만 기병은 서남쪽으로 출발했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부지)
황제의 기는 흔들거리며 가다가 멎고 천천히 움직여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장안 서쪽 백 여리에 이르렀다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불발무내하)
여섯군대가 출발하지 않으니 천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갸름한 눈썹의 양귀비는 말 앞에서 살해되었다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그녀의 꽃 비녀는 땅에 버려졌으나 줍는 사람도 없었다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물총새 깃털, 공작모양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 모두
君王俺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천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하니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루상화류
돌아본 얼굴에는 피 눈물이 뒤섞여 흐른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황색먼지 뿌옇고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雲棧영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길로 검각산을 오른다
峨眉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적고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천자의 깃발도 빛이 없고 햇빛도 약하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나라 강물은 파랗고 촉나라 산빛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천자는 아침 저녁 그리운 정으로 가득하다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궁전에서 달을 보면 달빛으로 슬픔을 느끼고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밤비속에 창자를 끊는 듯한 방울소리를 듣는다
天旋地轉廻龍馭(천선지전회용어)
천하 정세는 바뀌어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오다가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불능거)
그곳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다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이토중)
마외 고개 아래 진흙 속에
不見玉顔空死處(불견옥안공사처)
옥같은 얼굴은 볼 수 없고 죽은 곳만 남아 있었다
君臣相顧眞霑衣(군신상고진점의)
천자도 신하도 서로 눈물로 옷을 적셨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성문 향해 말이 가는대로 돌아왔다
歸來池苑皆依舊(귀래지원개의구)
돌아오니 연못도 동산도 옛날 그대로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 연못 연꽃도 미앙궁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
芙茸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그녀 얼굴 같고 버들은 그녀 눈썹 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불루수)
그것들을 대하니 어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날이나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엽락시)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
西宮南苑多秋草(서궁남원다추초)
서궁이나 남원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落葉滿階紅不掃(낙엽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단풍을 쓸어낼 사람이 없었다
梨園弟子白髮新(이원제자백발신)
이원제자들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로)
초방의 궁녀들 푸르던 눈썹이 늙었다
夕展螢飛思초然(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전에 반디가 날아드니 쓸쓸한 생각에 잠기고
孤燈조盡未成眠(고등조진미성면)
외로운 등잔심지가 끝까지 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遲遲鐘鼓初長夜(지지종고초장야)
시각을 알리는 종과 북소리가 들려오니 밤이 긴 것을 알고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날이 새는 하늘에 은하가 반짝인다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랭상화중)
원앙 모양의 기와는 차갑고 서리는 무겁고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비취 날개 수놓은 이불은 싸늘하여 함께 잘 사람이 없다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삶과 죽음의 세계는 멀어 오랜 세월이 흘렀고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부증내입몽)
혼백은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臨공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임공도사를 손님으로 초대하여
能以精誠致魂魄(능이정성치혼백)
정신을 집중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내나
爲感君王輾轉思(위감군왕전전사)
그는 천자가 잠못이루고 사모함에 감동하여
遂敎方士殷勤覓(수교방사전근멱)
드디어 가르침에 따라 방사를 시켜 부지런히 혼이 있는 곳을 찾게 했다
排雲馭氣奔如電(배운어기분여전)
방사는 구름을 열고 번개처럼 달려가
昇天入地求之遍(승천입지구지편)
하늘에 오르고 땅속에 들어가 샅샅이 찾았다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락하황천)
위로 하늘 끝 아래로 황천까지 찾았으나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불견)
어디나 끝없이 펼쳐질 뿐 혼을 찾을 수 없었다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문득 들리는 말이 해상에 신선 사는 산이 있는데
山在虛無표묘間(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무것도 없는 먼 곳에 있다고 했다
樓閣玲瓏五雲起(누각영롱오운기)
누각은 옥처럼 빛나고 오색 구름 솟으며
其中綽約多仙子(기중작약다선자
그 안에는 나긋한 모습의 선녀가 여럿 살고 있었다
中有一人字太眞(중유일인자태진)
그 중에 자를 태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참치시)
눈같은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 양귀비와 비슷하다 했다
金闕西廂叩玉경(금궐서상고옥경)
선산 황금 궁전 서쪽 건물 옥문을 두드리니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소옥이란 시녀로부터 쌍성이란 시녀에게 전해졌다
聞道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한나라에서 먼길 찾아온 천자의 사자라는 말 듣고
九華帳裏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온갖 꽃모양 호화로운 휘장안에서 태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옷을 손에 들고 베개를 밀치며 일어나 배회하는데
珠箔銀鉤이리開(주박은구이리개)
진주 발과 은 갈고리가 뒤이어 열린다
雲빈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각)
구름처럼 치켜올린 머리는 갓 일어나 반쯤 흩어졌고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래)
꽃으로 만든 관을 정돈하여 쓰지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왔다
風吹仙袂飄요擧(풍취선몌표요거)
바람이 신선의 옷깃을 펄럭이게 하고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마치 예상우의 춤을 다시 보게 해주는 듯했다
玉容寂寞淚난干(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하게 눈물 떨어지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듯 했다
含情凝제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을 간직한 채 사자를 보며 군왕께 감사를 전했고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양묘망)
이별후 천자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두 흐릿해졌다 한다
昭陽殿裏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천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도 끊어졌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선산 봉래궁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廻頭下望人환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를 돌려 아래 인간세상을 굽어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가 자욱할 뿐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다만 천자가 주신 기념품으로 내 깊은 정을 표시하고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차기장거)
나전 상자와 금비녀를 주며 가져가라 하니
釵留一股合一扇(차류일고합일선)
금비녀도 나전 상자도 반씩 나누어 간직하겠다고 한다
釵擘黃金合分鈿(차벽황금합분전)
금비녀도 반으로 나누고 나전 상자도 둘로 나누었다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우리 마음 본래 하나였던 이 비녀와 나전처럼 맺어졌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언젠가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만날 날이 있겠지요
臨別殷勤重奇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간곡히 다시 전할 말 부탁했는데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그 중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도 끝이 있고 시간조차 다함이 있으나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양귀비가 교살된 후 당현종(唐玄宗)은 줄곧 그녀를 잊지 못하여 가슴 아파한다.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고 장안이 수복되었다.
당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보이는 사물마다 양귀비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는다.
외로운 밤은 왜 이리 긴가, 그토록 사랑했던 양귀비는 어찌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가!
그리움에 사무쳐 날로 쇠약해져 갈 때 임공(현재의 사천성)의 도사가
장안에 왔는데 도술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를 수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도사에게 양귀비의 혼을 찾아주길 부탁하게 된다.
어명을 받들어 도사는 하늘과 땅을 샅샅이 뒤져 봉래산(蓬萊山)에서 자(字)가
태진(太眞)이라는 선녀를 만나게 된다.
선녀는 자신이 양귀비임을 밝히고 여전히 천자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전합과 비녀를 반으로 나누어 건네주며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두 사람의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도사가 양귀비를 직접 만났다는 증거로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날 장생전에서 있었던 일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이 없을 때 서로 속삭인 말이었다.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우리 둘이 비익조 되어 날고 지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우리 둘이 연리나무 가지가 되고 지고
이 말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니
전하면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 이후의 결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바로 다름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는 영원한 것이라지만 끝날 때가 있으나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길이길이 다할 날이 없으리라.
「장한가」는 신화적인 사랑을 더욱 애절하고 아름답게 포장하게 된다.
대당제국(大唐帝國)의 황제와 최고의 미인.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건이요,
그로 인해 자신의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는 것
또한지극히 가슴 저미는 스토리다.
일국의 황제로서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두고
여생을 고통과 회한 속에 마감했다는 것도 범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는 설령 백거이의 「장한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조건이 구비된 셈이다.
백거이의 환상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흔치않은 러브 스토리는
더욱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마지막 두 구절에서 장한가라는 말도 나왔다.
"천장지구"지만 "차한면면"하여
"다함없는 한스러운 노래" 곧 「장한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한가(長恨歌 기나긴 한의 노래) - 백거이(白居易)
‘芙茸花 부용화’
낙엽 관목으로 무궁화과에 속하며, 꽃의 모양이나 잎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곧잘 무궁화라고 우기곤 하지요.
그러나 줄기를 제외하고 잎과 꽃의 크기에 있어서 부용이 더 크고 꽃색도 화려합니다.
또한 나무 종류라 하지만 줄기는 녹색을 띤 반관목성 초본 식물이라는 점도
확연한 구별법입니다.
옛사람들은 이 꽃을 특히 아름답다고 보았나 봅니다.
거의 손바닥 하나를 다 가릴 만한 크기에 흰색, 붉은색, 분홍색 등으로
아주 다양한 색깔로 피는 모습은 정말 반할만 합니다.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 고을 원님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죽은
신라 때의 부용아씨 설화나 실화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부용상사곡"이라는 고대소설 속의 기생 부용을 보면
옛사람들의 그런 감정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은 영조·정조 이후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처럼 작품 속의 가사명을 표제로 삼았습니다.
주인공인 김유성(金有聲)이 평양을 유람하다 명기(名妓) 부용(芙蓉)과 백년언약을 맺고 서울에 간 사이에, 부용은 못된 신임 감사의 수청강요에 못이겨 대동강에 투신하였으나 어부의 손에 구출됩니다.
유성의 과거 급제 소식을 접한 부용이 《상사곡(相思曲)》을 지어 보내자
그녀의 소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이 만나 해로(偕老)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마치 심청전과 춘향전을 섞어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죠?
우리 국문학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답니다.
중국 원산으로 우리나라에는 관상용으로 길가나 정원에 흔히 심는데,
부산의 경우엔 올해 대부분의 공원에 심어져서 여름 내내 시원하고 화사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신시가지 대천공원, 광안리 수변공원, 온천천공원, 이기대 공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남해 고속도로 마산 톨게이트 앞 100미터 지점에 무리지어 핀 모습과
경부고속도로 언양 툴게이트 부근에도 잘 볼 수 있지요.
한방과 민간에서는 뿌리 껍질을 해독, 해열, 관절염, 늑막염 등에 처방합니다.
꽃말은 "섬세한 미모"인데
우연히라도 이 꽃을 보게 되면 "아하!"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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